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파기를 정면으로 문제 제기하려다, 예기치 못하게 조기에 탄핵되는 바람에 4년간 심혈을 기울여서 집필했는데도 거의 탄핵되다시피 서점에서 안 팔린 <공약파기>의 저자 윤형중입니다. 제가 요즘은 블록체인 분야를 취재하곤 있지만, <공약파기>의 저자로서 이번 최저임금법 개정안에 대해 한 마디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번 최저임금법 개정안, 많이들 어려우시죠? 저도 무척 어렵습니다. 최저임금에 새로 산입되는 항목이 정기상여금이다, 복리후생비다 뭐다뭐다.. 그래서 얼마가 변하고, 누구에겐 별 차이 없고, 아니 그게 아니라고도 하고.. 분분한 논란들... 아니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최저임금에 어떤 항목이 들어가는지 그 누구라도, 어느 때라도, 이렇게 관심을 가져준 적이 있습니까. 왜 이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나서 논의가 시작되는거죠?? 법 바뀌고 나서 논의를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결국 이번 일은 '공약을 만드는 프로세스가 완전히 잘못됐다는 반증'입니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겠단 공약을 무리하게 지키려다 보니, 발생한 일이죠. 이 모든 논의는 선거 때 해야 하는 겁니다. 선거 때 후보들은 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고, 언론들은 시시때때로 여론조사 결과를 중계하듯 보도하는데요. 그때 후보들도 이런 공약의 세부사항을 논의하고, 언론들도 이런 보도를 해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게 제가 <공약파기>란 책을 쓴 취지이기도 합니다.
<공약파기> 2장의 앞 부분(51~53쪽)을 살짝 발췌할게요.
##당선 첫날에 등장한 공약수정론
“당선인은 선거 기간 국민에게 ‘해주겠다’는 말만 했다. 이제부턴 ‘참아달라’는 말을 함께 해야 한다. 공약은 지켜야 하지만 당장 해야 할 것과 중·장기 과제로 추진할 것을 구분하는 선거공약 아닌 국정國政 공약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조선일보〉, 2012년 12월 20일자 사설
“박 당선인이 공약한 각종 민생 프로그램을 집행하려면 5년간 132조 원이 새로 필요하다. 저성장으로 국가의 부富가 정체되면 무슨 돈으로 할 것인가. 북한 급변사태라도 터지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데 그것은 또 무엇으로 감당하나. 약속의 실천은 중요하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국민을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통치다.”
〈중앙일보〉 2012년 12월 20일자 사설
“표심을 의식해 충분한 검토 없이 급조한 공약이 적지 않다. 성장률이 1%포인트 떨어지면 약 10조 원의 세수가 줄어든다. 내년 경제성장이 정부 전망치(4%)를 밑돌면 세수 감소는 불가피하다. 복지 공약의 우선순위를 따져 접을 것은 접고, 지켜야 할 것은 재원 확보 방안을 마련해 단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동아일보〉 2012년 12월 20일자 사설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가 2012년 12월 19일 밤 11시쯤 개표율 80%에 이르렀다. 국내에서 인쇄부수가 1,2,3등의 종합일간지인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는 20일자 조간신문의 사설로 ‘공약을 재검토하라’ 혹은 ‘지킬 공약과 지키지 않을 공약을 구분하라’고 대통령 당선자에게 조언했다. 이 사설들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간 시각이 19일 자정께, 바로 그 시각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광화문 광장에서 “앞으로 국민께 드린 약속을 반드시 실천하는 민생대통령이 돼서 여러분이 기대하시던 ‘국민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는 당선 소감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이자, 블랙 코미디인가. 대통령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당선 인사를 하는 그 시각에 국내 대표 언론사들은 “공약을 다 지키지 마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물론 세 언론사가 악의를 가지고서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공약 후퇴'를 권유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무리한 공약을 분별하고, 공약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길 바라는 충심어린 조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충심어린 조언이라면 대선 이전에 전해야 했다. 사실 공약은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공약의 존재 이유가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에 대운하처럼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공약이나,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공약들은 파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 제대로 된 선거라면,
- 해결이 시급한 사회 문제들이 무엇인지가 공론장에서 화두로 등장하고,
- 그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해법이 활발히 논의되고,
-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에 가장 가까운 해법들을 공약화하고,
- 당선 이후 공약이행 일정, 예산 조달 방안, 공약 파기할 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등을 미리 밝히고,
- 각자의 공약과 이행 방안 등을 서로 토론하며 공박하고,
- 그 토론에 출마자뿐 아니라 각계각층이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가 진정 축제가 될 수 있다. 이런 형태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이미 문제가 될 만한 공약의 대부분은 선거 과정에서 이미 폐기가 됐을 것이다. 또한 선거 끝까지 살아남은 공약이라고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환경이 급변하면 공론화 과정을 거친 후에 공약이 파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선거 전후로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됐고, 당선이 확정된 시점부터 주류 언론들이 나서서 공약을 지키지 말라고 권했다. 언론의 이런 행태는 저질 정치를 조장할 뿐이다.
//////
여기까지가 제 책 내용입니다. 우리 정치에선 1)~6)까지가 모두 생략된 느낌입니다. 제 책에서도 최저임금을 다룬 내용만해도 수십페이지가 넘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때도 최저임금 공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는 언제까지 얼마라는 공약은 없었고, 최저임금의 인상기준을 마련하는 제도 마련이나, 최저임금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처벌 강화 등이 공약이었습니다. 이 공약들이 어떻게 파기되었는지도 책에 아주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제가 지난 대선 국면에서도 최저임금 이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인상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인상률은 미리 언제까지 얼마라고 정해서 갈 일이 아니라, 매년 신중하고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지를 드러낼 순 있겠죠. 인상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효성입니다. 최저임금은 대표적으로 잘 안 지켜지는 제도입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통계와 내용도 책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의 논란이 참 불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