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the writer
……하늘은 붉었다.
정원에 흐드러진 라일락과 아직 피지 못한 라벤더도 금빛 찬란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바람개비와 함께 실바람에 반짝거렸다.
나는 모래사장에 앉아 흙장난에 열중이었다. 내 작은 손은 장난감 포클레인으로 덤프트럭에 모래를 퍼 담느라 바쁘게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작은 손이 덤프트럭을 가로채갔다. 어린 지미였다. 지미는 나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내 주위를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덤프트럭에 가득 담았던 모래알이 혜성처럼 긴 꼬리를 반짝이며 사방에 흩뿌려졌다.
“지미! 돌려줘!”
나는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정신없이 도는 지미에게 소리쳤다. 지미는 까르르 웃을 뿐 멈추지 않았다.
“하늘을 봐! 하늘이야!”
나는 고개를 더 높이 들어 지미의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게 돌고 있어! 모든 게 돌고 있다구!”
하늘을 빈틈없이 메운 것은 저물어가는 해와 구름이 만들어낸 해 질 녘의 노을이 아니었다. 선명하게 가로 새겨진 붉고, 하얗고, 노란 줄무늬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천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것은 하늘 그 자체였다. 색색의 줄무늬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며 소름 끼치는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빼앗긴 하늘 그 가운데, 원래 떠 있어야 할 태양보다 몇십 배는 더 큰 붉은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직경 40,000km의 붉은 태풍이 커피 속에 부드럽게 퍼지는 크림처럼 기묘하고 기분 나쁜 움직임으로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시속 432km로 소용돌이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주는 왜 끝없이 넓을까.
나는 눈을 떴다. 순간, 하마터면 몸을 움직일 뻔했다. 자유롭게 뛰놀던 어린 시절은 이제 오간 데 없이 끔찍한 현실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오래 걸려도 상관없었다. 내게 시간만큼 많이 남은 건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진실로 믿진 않았다. 내가 처한 상황과는 무관한 생각이었다.
내 생각……. 그래, 내 생각을 말해 볼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자유야말로 인간이 존엄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도구일 것이다. 자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 정신의 자유와 육신의 자유. 이 뻔한 두 가지가 합쳐져야 흔히 말하는 자유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두 자유는 사상과 행동의 자유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하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두 자유는 분리할 수 없는 신경망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의 사상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협소한 범위의 사유만 가능한 자의 행동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들은 누군가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자유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유로운 생각을 하고 자유로운 행동을 할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사회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 가능성을 제한한다. 어려서는 가정, 조금 더 크면 학교, 더 나아가서는 사회라는 틀이 교육이라는 도구를 통해 책임, 의무, 배려를 자유의 원천에 혼합한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화학 반응은 원초적이었던 자유를 인간 사회에 걸맞은, 아니 요즘은 한발 더 나아가 생태계 전체를 고려하는 세련된 자유로 탈바꿈시킨다. 세련된 자유는 직장 상사의 부당한 대우와 인격모독을 참아내는 자유다. 당장 주먹을 날려 앞니를 세 개쯤 부러뜨리고 공공에 밝혀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싶더라도 밥벌이를 계속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참는 자유를 택하는 자유다.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자유를 택하는 자유, 그런 자들을 응징하는 자유를 택하지 않을 자유, 우리가 행사하지 않은 만큼 소수의 권력자에게 돌아간 자유를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을 택하는 자유다.
헛소리. 그딴 게 다 무어람. 인간이 존엄성을 유지하려면 인간이 원래 행할 수 있는 기능이 온전하게 작동해야 한다. 사고 기능에 이상이 생긴 자가 어찌 정신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누리겠는가? 운동 기능에 이상이 생긴 자는 또 어떠한가. 걷고 말하고 먹는 기본적인 행동은커녕 얼굴에 날아든 파리를 내쫓을 능력조차 없는 자가 진정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가? 고매한 정신의 자유만 보장된다면 육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똥오줌을 가릴 수 없어 다른 이에게 치부를 보여야 하는 일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품위와는 거리가 멀다. 장애는 창피한 게 아니라고? 사회 구성원들은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니 괜찮다고? 그런 허울 좋은 말이 정녕 머리가 아닌 가슴에 와 닿는다면 당장 침대에 누워 똥오줌을 누고 타인의 손을 빌려 뒤처리를 해결해 보라. 장애로 인해 교육이 제한되고 경험이 제한되고, 그로 인해 정신과 사상의 성장이 제한되는 일을 겪어 보라.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가지 자유의 결합이 온전히 꽃피우지 못하고 시들어버린다. 모두가 제한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항변은 필요 없다. 그는 최소한의 존엄조차 제힘으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감금증후군이라는 빌어먹을 놈에게 자유를 빼앗긴 것도 벌써 20여 년이다. 이름도 잘 지었다. 감금증후군이라니. 이 증상은 숨을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것 외에는 운동 기능을 모두 상실한 육신에 멀쩡한 정신이 갇힌 걸 말한다. 파리와 거미가 눈앞에서 자신을 위협해도, 강도가 눈앞에서 가족을 해쳐도, 지진으로 온갖 집기가 쏟아지고 가구가 쓰러지고 지붕이 무너지는 걸 봐도 꼼짝도 못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증상이다.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환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눈동자를 움직이고 눈꺼풀을 깜빡일 수 있는 정도의 자유가 주어진다. 또 하나는 사유의 자유다. 이것은 그 반대를 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공평한 자유의 대표다. 생각할 수 있는 자유는 누릴 수 있지만 생각을 멈출 자유는 전혀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유가 하나 더 있다. 듣는 자유다. 청각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갖 소리를 인지한다.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 왜 이런 것들에는 개별적으로 온오프 스위치가 없는 걸까.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본 적 있는가? 벽지에 그려진 무늬가 몇 개인지 세어볼 만큼 지루한 시간을? 이것은 외출 금지 처분이 내려진 철없는 10대의 불만 가득한 주말 밤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직 침대라는 한정된 공간에 시체처럼 누워 눈앞에 보이는 한정된 광경만 볼 수 있다. 물론 보호자의 친절로 TV를 볼 수도 있다. 안락의자에 앉아 한 손에는 리모컨을, 다른 한 손으론 감자칩을 집으며 이리저리 채널을 탐색하는 호사는 누리지 못하지만. 때로는 음악을 듣거나 오디오북을 들을 수도 있다. 원치 않는 부분을 넘기거나 할 수는 없지만.
창밖으로 자전거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팔팔한 애들을 보며, 시원하게 나자빠져 아스팔트 위에 얼굴을 긁어먹거나 별안간 튀어나온 자동차에 치여 허공을 붕 날아가기를 염원하는 것도 마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는 시간에는 생각을 해야 한다. 대게는 이런저런 것들을 상상한다.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낫는다면. 그냥 낫는 게 아니라 초능력이라도 생긴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무슨 초능력이 좋으려나? 투시력으로 여자들 알몸을 훔쳐보는 것도 재밌을 테지. 슈퍼맨 같은 초인적인 힘이 더 나으려나. 다시 환자 신세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건 놓칠 수 없는 능력이지. 대신 제약이 따른다면 어떨까? 하늘을 날 수는 있지만 감금증후군은 계속되는 거지. 중력 때문에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날아가는 모양새는 좀 우습겠지만 지금보다는 백배 낫지 않을까.
딜레마를 놓고 고민할 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다시 일어나 정상인으로 1년 살다 죽는 것과 이 상태로 100살까지 살다 죽는 것. 이런 상태에 오래 있으면 망설임 없이 정상인으로서의 1년을 선택하리라 생각하겠지만 내 경우는 꼭 그렇지 않다. 100살까지 살면 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두고 볼 수 있으니까.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는 때론 절대적인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면 정상인으로서 사는 시간을 늘리면 어떨까? 1년이 아니라 10년으로. 반대의 경우는 50살로 줄여 보자. 선택이 더 어려워졌을까 쉬워졌을까.
앞서 말한 대로 육신이 온전치 못하면 이게 문제다. 나처럼 어린 나이에 환자가 되면 상상의 토대는 저렇듯 매우 빈약할 수밖에 없다. 열성적인 엄마 덕분에 각종 교양 채널과 학습 채널을 섭렵하더라도 정신의 비약적인 성장을 주도하기에는 턱없다. 직접 부딪혀 얻는 것이야말로 어린아이를 성인으로 키워내는 훌륭한 비료 아닌가. 내게 결핍된 게 바로 그거다.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는 능력. 사지를 움직여 돌아다니고 보고 듣고 배우고 도전하고 깨지고 울고 웃을 기회. 그것이 빠진 인생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 걸 삶이라고 부를 수는 있단 말인가? 공상은 지루한 수업 시간의 버팀목이지만 그 수업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면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까. 아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물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유한함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