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로 뒤덮인 마트, 다가오는 괴물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엄청난 대혼란 앞에서 카모디는 신의 이름을 외친다. 오 주여! 그녀의 이러한 광신적인 태도는 영화를 보는 내내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주었고, 마트를 탈출하려는 장면에서 그녀가 죽는 순간 진심으로 통쾌했다. 그래, 넌 진즉에 죽었어야 했어! 나는 그제야 일이 제대로 진행되어간다고 느꼈다. 만약 데이빗 일행이 탈출에 성공했다면 그녀에 대한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은 나로 하여금 카모디를 다시 생각하도록 했다. 인간에게 이 세상은 얼마만큼은 신비롭고 불가해(不可解)한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그저 짐작만 한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 이러한 알 수 없는 인생 앞에서 사람들은 우주의 신비를 알고자 한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우리 곁에는 ‘예수’가 있었고 ‘운명’이 있었다. 때론 ‘부조리’가 있었고 ‘유전자’가 있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 세상을 설명해주고 의미를 부여해줄 ‘그 무엇’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 동안 삶이 기반하고 있던 인식체계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괴물에 의해 당장의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의 상황에서, 카모디와 그 일파에게도 ‘그 무엇’은 마찬가지로 필요했다. 이 영화에서는 그 자리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을 뿐이다. 광기에 휩싸인 그들을 보며 불쾌함을 느꼈던 것은, 단지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안정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수 천 년 동안이나 토템이나 신과 같은 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그들이 보인 모습은 자연스러웠고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데이빗에게 깊이 몰입한 채 이 장면을 보았는데, 네 번의 총성이 울리고 안개가 걷히는 순간 데이빗의 절규하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아, 저런 것이 바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소설 속 장면.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일제시대 독립혁명가 장지락(김산)의 자서전과 같은 것인데, ‘조선시대 민중은 너무 쉽게 자살하는 연약한 민족’이라 말하는 님 웨일즈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살은 식민지 민중이 선택할 수 있는 불과 몇 안 되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입니다.” 영화를 본 뒤에야 비로소 (아마도 실재했을) 소설 속 이 장면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고, 그 소설 덕분에 데이빗의 행동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차 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포함하여 네 명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신은 괴물과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리라 결의했던 데이빗의 행동은 극한의 상황에 놓인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불과 몇 안 되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로 나에게는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면서 데이빗의 행동은 결국 끔찍한 비극으로 드러난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두 눈을 찔렀던 오이디푸스나 목을 매달아 자살한 이오카스테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잘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최선의 선택이 비록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 순간 최선의 것을 택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마틴 루터 킹이 비난을 무릅쓰고 백인 숙소에서 잘 수도 없는 일이었고,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신탁을 듣고도 부모님이 계신 코린토스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운명 혹은 신(神)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우리들 인간이 처해있는 실존적 조건 하에서 안개(Mist)가 영원히 걷히지 않으리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