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머리카락이 아주 길었다. 허리를 넘어 엉덩이에 닿을 길이였다. 일부러 기른 건 아니고 미용실 가기 귀찮고 돈도 아까워서 내버려뒀더니 어느새 그만큼 자랐다.
머리가 길면 귀찮은 일이 많다. 머리 짧을 때와 떨어지는 머리카락 양은 동일할 텐데 이상하게 더 많이 빠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방바닥에 수북하게 떨어진 머리카락이 보기 싫어 청소를 자주 해야 한다.
관리도 어렵다. 머리카락 끝까지 영양이 안 가는지 푸석푸석해져서 자꾸 엉켜버린다. 머리 감고 말릴 때 시간도 오래 걸린다. 젖은 머리가 무거워서 허리까지 아픈 건 덤이다.
하루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 미용실 가서 싹둑 잘랐다. 머리카락 끝이 어깨에 닿을락 말락하는 단발이 되니 머리가 엄청 가볍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얼굴도 좀 어려 보여서(그래봤자 못생겼지만!) 기분이 좋았다. 내가 단발이 된 걸 남자친구가 좋아하지 않는 눈치라 약간 신경쓰이긴 했지만.
머리를 자른 뒤 얼마간은 정말 편했다. 샴푸칠도 한 번만 하면 되고(머리가 길 땐 두세번씩 했다) 머리 말리기도 간편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게 되자 또다시 머리 감기가 귀찮아졌다. 매일 감는 것도 아니고 이틀에 한 번, 때로는 삼일에 한 번 감는데도 그 한 번 감는 게 싫어서 미루고 미뤘다. 이렇게 게으른데 대체 밥은 어떻게 하루 두끼 꼬박꼬박 먹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머리 감기를 자기 직전까지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허리를 굽히고 샤워기로 머리를 적시는데 아뿔싸 전구가 픽 나가버렸다.
화장실엔 창문이 없어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다. 벽을 더듬어서 수건을 찾아 머리를 대충 감싸고 나왔다. 방으로 가서 휴대폰 조명을 켜서 화장실로 가져왔다.
그 휴대폰을 선반에 두려다가 거울을 봤다. 조명이 비스듬하게 얼굴 아래를 비추는 게 좀 무서웠다. 당장 캔디맨을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면 블러디 메리. 블레어 윗치 같기도 했다(정작 이 영화는 안 봤다) 작년에 플스4로 했던 언틸 던도 떠올랐다(초반엔 정말 흥미진진했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그냥 그랬다.)
어쨌든 별로 밝지 않은 휴대폰 조명에 의지해 어렵게 머리를 감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전구 수명이 다 되어가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부터 화장실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한번에 켜지지 않았다. 몇 번 깜빡거리다가 갑자기 확 밝아졌다. 수명이 다 된 전구는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2배는 밝게 느껴진다. 그걸 보고도 조만간 전구를 사러 마트에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기만 했다.
전구를 미리 사뒀으면 이런 어둠속에서 머리를 감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냐 싶으면서도 내가 한심스러웠다.
몇 년 전, 랜섬웨어가 기승을 부렸을 때 나는 비트코인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해커들이 파일 암호를 풀어주는 대가로 비트코인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여러 싸이트에 랜섬웨어에 당한 사람들의 글이 올라왔다. 그걸 보고 불안한 마음에 비트코인을 검색해봤다. 혹시 내 컴퓨터도 랜섬웨어에 당할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위한 대비였다.
당시 비트코인이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싸긴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의 관심사도 지금과 달랐다. 비트코인을 검색하면 랜섬웨어 이야기가 훨씬 많이 나왔다. 익명성, 추적 불가, 사이버 범죄에 악용... 뭐 그런 정보들만 실컷 봤다.
다행히 내 컴퓨터는 랜섬웨어에 당하지 않았다. 나는 비트코인에 관심을 끊었다.
작년 초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우연히 어느 작가님을 만나게 됐다. 익명으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잡담하던 곳이라 그분의 필명이 무언지는 모른다.
그때 나는 슬럼프를 이겨낼 방법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즐겁게 글을 쓸 수 있는지, 부담감을 이겨낼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다녔다. 그분은 내 고민에 공감해주었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서로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꼈고 우리는 여전히 익명인 채로 1대 1 채팅을 하게 됐다. 처음엔 소설 이야기만 하다가 차츰 대화 주제가 다양해졌다. 나는 친구가 적다. 정말로 적다. 단 둘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말 상대가 생기니 굉장히 신났다. 초면인 사람에게 별소릴 다했다. 당연히 턱없이 적은 인세 수입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분은 가난한 나를 무척 안타까워했다. 돈이 급한 작가가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말씀해줬다. 그러고는 다른 이야기를 한 시간쯤 더 하다가 문득 혹시 비트코인을 알고 있냐고 운을 뗐다.
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몇년 전과 달리 비트코인이 많이 알려진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가격도 상당히 올랐고. 그러자 그분은 혹시 이더리움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모른다고 하자 그분은 살 마음이 있다면 몇 개 사놓으라고, 그게 나중에 비트코인처럼 값이 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이더리움을 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비트코인도 못 믿을 판에 웬 듣보잡 코인? 진심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예의상 이더리움을 검색해보고 와 싸네요, 저도 한 10개는 살 수 있겠네요, 하고 맞장구쳤다.
그분은 ㅋㅋㅋ하고 웃었고 우리는 다시 처음처럼 소설 얘기를 했다. 그런 다음 서로 힘내자고, 열심히 글써서 대박내자고 덕담하고 채팅을 끝냈다.
나는 그분이 알려주신 여러 정보(각 출판사의 계약금 및 인세 비율, 믿을 수 있는 매니지먼트 등등)가 무척 감사했지만, 이더리움만큼은 예외였다. 오랜만에 마음 맞는 사람과 소설 얘기를 실컷 한 것에 만족했을 뿐이다. 나는 이더리움에 관심을 끊었다.
작년 12월이 되어서야 나는 알았다. 그 익명 작가님이 내 깜깜한 인생에 빛이 들게 해줄 은인이었는데 내가 몰라봤다는 사실을.
물론 그때 내가 가진 돈을 다 털었다 해도 이더리움을 20개 이상 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인생이 단번에 바뀔 돈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깜깜한 인생, 앞으로도 계속될 그 어둠을 조금은 밝힐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일을 두고두고 아쉬워하다가 우연히 스팀잇을 알았다. 며칠을 고민했다. 소설 쓸 시간도 모자란데 블로그에 글을 열심히 쓸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덜컥 가입해버렸다. 딱 한 달만 내 모든 시간을 쏟아서 활동해볼 마음을 먹고.
스팀과 스팀 달러가 제 2의 비트코인, 이더리움이 될 거라는 확신은 전혀 없다. 나는 코인에 문외한이다. 블록체인이 뭔지 이제 겨우 알아가는 중인데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갖겠는가. 전문가 분들의 블로그를 팔로잉해놓고 열심히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나중에 혹시 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시작했다. 아 그때 가입해서 활동할걸, 관심을 계속 가질걸, 하고 미련을 가지는 날이 올까봐.
어제 내 단 둘 뿐인 친구 중 한 명에게도 스팀잇에 가입하길 권했다. 하지만 친구는 시큰둥했다. 돈 한 푼 투자하지 않고 글만 써서 언제 스팀을 많이 모으겠냐고, 또 모아봤자 그게 나중에 값이 오르긴 하겠냐는 거다. 그럴 시간에 소설을 더 열심히 쓰라고도 했다.
사실 맞는 말이다. 나도 확신이 없으면서 남에게 권하는 게 웃긴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기가 생겼다. 나는 친구에게 큰소리를 쳤다. 지금부터 이 대화를 녹음해두라고, 스팀 1개가 백만원 하는 날이 오면 너에게 선물로 1개 주겠다고.
친구는 아마도 내 말을 녹음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팀잇에 대해서도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친구가 나중에 나에게 스팀을 선물받고 나를 부러워하는 날이 올까? 내가 은인분께 권유받은 이더리움을 사지 않은 걸 아쉬워하듯 스팀잇을 시작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날이 올까?
내 헛소리를 다 들어주는 소중한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