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만 하더라도 작년 겨울보단 따뜻해서 살 만하다고 느꼈다. 보일러를 한 번도 틀지 않았고 밤에 전기장판 켜는 것만으로도 잠이 잘 왔다. 이대로라면 무리없이 겨울을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불과 며칠만에 깨졌다. 끔찍한 한파가 몰아친 것이다. 바깥 기온은 영하 15도에 실내 기온도 10도 이하로 떨어졌다. 실내 기온이 표시되는 보일러 조절기가 이 집에서 가장 따뜻한 큰방에 붙어 있는 걸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추운 것 같다.
날이 추우면 사람도 고달프지만 고양이는 더 고달파한다. 내가 거실에서 TV를 보려고 바닥에 앉으면 고양이 두마리가 서로 달려와서 내 무릎을 차지하려고 싸운다. 승자는 무조건 둘째다.
첫째는 둘째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크고 나이도 더 많고 몸무게도 더더 많이 나가지만, 늘 둘째한테 진다. 내 무릎을 둘째한테 빼앗기고는 서글픈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마치 시골 외할머니댁에서 키우던 송아지처럼 둥그런 눈을 끔뻑거린다. 음메에~ 대신 애오옹~ 하고 구슬프게 울어댄다.
그럼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TV 보기를 포기하고 큰방으로 간다. 전기장판을 켜고 앉아 있으면 고양이들은 이불 위를 이리저리 쿡쿡 눌러본다. 어디가 더 따뜻한지 찾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대다가 마음에 드는 자리를 정해 앉는다.
하지만 가끔은 고양이들이 춥다고 울어도 TV가 너무 재미있어 큰방에 가기 싫을 때가 있다. 내가 큰방에 안 가고 버티면 첫째는 계속 구슬프게 울고, 둘째는 컴퓨터 책상으로 올라가서 잡동사니를 쳐서 떨어뜨린다. 그럼 화가 막 난다. 고양이들을 잡아다 억지로 내 앞에 앉혀놓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어이구 이놈의 자식들아, 엄마 티비 좀 보자! 춥긴 뭐가 추워! 지금 바깥에 있는 고양이들은 다 얼어죽게 생겼는데 따뜻한 집에 살면서 말이야! 너흰 털도 있잖아! 나는 털도 없거든! 내가 더 추워!
물론 아무리 말해도 고양이들은 못 알아듣는 눈치다. 자꾸 큰방으로 가자고 보채기만 한다.
생각해보면 겨울을 맞아 털이 잔뜩 부푼 고양이보다 내가 더 따뜻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금 중무장 상태다. 수면양말에 실내 덧신을 신었고, 위아래 한 벌인 홈웨어 위에 남자친구의 깔깔이, 또 그 위에 두꺼운 모포 재질의 큼지막한 가운까지 입고 있으니까.
그럼 다시 마음이 약해지면서 고양이들에게 화를 낸 게 미안해진다. 조용히 TV를 끄고 큰방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외출용 겨울 외투가 딱 한 벌 있다. 원래는 외투가 없고 두꺼운 가디건을 입고 다녔는데, 같이 살던 친구가 결혼하며 본인 외투를 나에게 주고 갔다.
친구는 외투말고도 본인 옷중에 커서 못 입는 옷(친구는 무척 날씬하지만 나는 살이 쪘다ㅜㅜ), 믹서기, 옷 거는 행거, 안 보는 책 등등 많은 것을 나에게 주고 갔다. 친구가 떠나 혼자 살게 되어 외로웠지만, 또 생활비도 혼자 감당하게 되어 버거웠지만, 내 물건이 많아진 것만큼은 기뻤다. 나는 외출할 일이 있을 때마다 친구의 외투를 입었다.
문제는 날씬한 친구의 몸집에 맞는 외투라 나한테는 너무 딱 맞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안에 뭘 더 껴입을 수 없다. 무조건 긴팔 티 한 장만 입어야 했다.
맨날 같은 외투만 입는 나를 남자친구는 안쓰러워했다. 매년 겨울마다 나한테 패딩점퍼를 사주고 싶어했다. 나는 필요없다고, 헛돈 쓰지 말고 니 패딩이나 하나 더 사라고 했다. 어차피 겨울엔 밖에 잘 안 나가고 마트도 한 달에 두 번 갈까 말까인데 괜히 비싼 새 패딩을 살 이유가 없으니까.
남자친구와 패딩 문제로 몇 년을 다퉜는데 결국 올해엔 내가 지고 말았다. 왜냐햐면 쓰는 소설마다 망하는 데다 이젠 소설 쓰기도 힘들어져서, 더 늦기 전에 일을 하러 가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식당에 가든 공장에 가든 일을 하러 가려면 옷이 필요하다. 맨날 같은 옷을 입으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흉을 볼 것 같았다. 예전에 식당에서 일할 때 그런 적이 있었다. 나보고 돈 번 걸로 대체 뭐하냐고, 왜 소매가 다 터진 옷을 입고 다니냐고 거지냐고 했다. 농담으로 한 말인 건 알지만 슬펐다. 나쁜 사람들ㅜㅜ
아무튼 나는 남자친구에게 미안해서 최대한 싼 패딩을 사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큰 걸로 사달라고 했다. 얇은 패딩이라도 안에 옷을 많이 껴입으면 따뜻하니까.
그러고서는 남자친구와 이야기한 걸 며칠간 잊고 있었는데 불쑥 택배가 왔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택배 박스를 뜯었다. 매년 싫다고는 했지만, 막상 새 옷을 가지게 되니 기뻤다. 그런데 패딩이 어쩐지 꽤 좋아 보였다. 박스에서 꺼내보니 심지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이었다.
그냥 패딩보다 롱패딩이 당연히 더 비쌀 것이다. 옷감이 더 많이 드니까. 불안한 마음으로 가격표를 봤더니 무려 19만원이라고 써 있었다.
맙소사 19만원이라니, 집에서 편하게 빈둥빈둥 놀고 먹는 주제에 이렇게 비싼 옷을 입어도 되나 싶었다. 갑자기 심장이 막 쿵쿵 뛰고 남자친구한테 너무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패딩을 환불하면 안 되냐고 했다. 비싸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패딩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 나한테 너무 크다(실제로 크긴 했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환불하기 귀찮으니까 대충 입으라고 했다. 패딩이 크면 안에 많이 껴입을 수 있고, 빙판길에 미끄러져 자빠져도 옷이 온몸을 보호해주니 무릎을 깨먹지 않을 거라는 거다. 나는 그래도 환불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는 또 패딩을 가지고 다퉜다. 패딩 색깔이나 사이즈로는 도저히 남자친구를 설득 못 하겠다 싶어 결국 사실을 고백했다. 19만원이나 하는 패딩은 너무 비싸서 부담스럽다고, 더 싼 패딩을 샀으면 좋겠다고.
내 말을 듣고 남자친구는 웃었다. 니가 나한테 그동안 뜯어먹은 돈이 얼마인데(내 생각에 1억은 될 것 같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겨우 19만원 가지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일해서 정가보다 훨씬 싸게, 거의 절반 가격으로 샀다고, 아무리 멍청한 나라고 해도 속지 않을 거짓말을 했다.
남자친구의 말을 듣다 보니 기껏 내 생각을 해서 사준 옷 가지고 계속 뭐라하기도 미안해서 그럼 알겠다고, 잘 입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제야 패딩을 감싼 비닐을 조심조심 벗겨냈다. 가격표도 미련없이 뗀 뒤 패딩을 입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확실히 패딩은 따뜻했고, 친구가 준 외투보다 가벼웠으며, 안에 옷도 많이 껴 입을 수 있었다. 거울을 향해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눈물이 조금 났다. 아니 사실 좀 많이 울었다. 나는 서둘러 패딩을 벗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옷장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패딩을 걸어놓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아무 이유없이 그냥 자꾸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