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는 게임을 무척 좋아한다. 스팀 싸이트(스팀잇이 아니다)에서 게임을 천 개 넘게 보유중이다. 게임기도 여러 대를 갖고 있다. 플스2 플스3 플스4, 닌텐도 DS와 Wii(스위치도 조만간 살 것 같다), 엑스박스, PSP, 기타 내가 이름을 모르는 게임기, 각종 조이스틱 등등.
박스가 멋진 스타2 한정판도 가지고 있고 최근엔 아이돌 마스터 한정판도 샀다. 무슨 시리즈인지는 모른다. 들었는데 까먹었다.
아무튼 남자친구는 돈을 버는 족족 나와 게임에 다 써버린다. 가끔 본인이 게임에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고 고민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사고 싶은 만큼 마음껏 사라고 말해준다. 돈 쓰는 재미가 있어야 더 열심히 돈을 벌게 된다는 말을 곁들여서.
나는 남자친구만큼은 아니지만, 게임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문제는 남자친구와 게임 취향이 다르고 즐기는 방식도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스타 크래프트1을 정말 좋아하는데, 결코 다른 사람과 대결하지 않는다. 오로지 컴퓨터랑만 한다. 그래야 치트키를 쓸 수 있으니까.
제일 큰 사이즈의 헌터맵에서 컴퓨터와 7대 1로 붙으면서 시작과 동시에 치트키를 열 번쯤 쓴다. 맵 밝히는 거 말고 나머지는 전부 쇼 미 더 머니다. 그럼 자원이 엄청 많아서 바로 병력을 뽑을 수 있다.
컴퓨터가 아둥바둥 자원 캐며 병력을 조금씩 늘릴 동안 나는 히드라 대군을 만들어서 컴퓨터를 다 잡아버리고 딱 한 놈만 남겨둔다. 다 죽여서 게임이 끝나면 안 되니까. 그러고는 광활한 헌터맵이 온통 끈적끈적한 보라색 크립으로 덮일 때까지 즐겁게 성큰을 깔아나간다.
남자친구는 나보고 그럴 바에 차라리 심시티를 하라고 했다. 물론 나는 심시티도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스타1로 하는 집짓기 놀이가 훨씬 재밌게 느껴진다. 그밖에 재미있게 한 게임이 메이플 스토리, 굶지마, 프린세스 메이커3 다.
써놓고 보니 나는 아기자기한 2D 게임을 좋아하나 보다. 스타1도 스타2에 비하면 나름 아기자기하니까.
남자친구도 메이플 스토리만 빼고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다 좋아한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원하는 건 같이 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같이 하자면서 권한 게 전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철권 같은 대전 게임은 안 좋아하고, 배틀 그라운드 같은 3D 게임은 눈이 핑핑 돌아 어지러워 속이 메스꺼워지며, 오버워치는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어려워서 할 엄두도 안 났다. 그나마 하스 스톤은 쉬워서 몇 번 했는데 금방 질리고 말았다.
그래도 남자친구가 자꾸만 같이 게임하자기에 한 날은 철권을 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봐주면서 하겠다던 약속과 달리 초보인 나를 상대로 온갖 현란한 기술을 걸어댔다. 아주 신이 나서 내 캐릭터를 K.O 시켜놓고 허공에 어퍼컷을 날리며 기뻐했다. 정말 발로 등짝을 차주고 싶었다. 어쩌면 찼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우리는 크게 다퉜다. 나는 화가 너무 나서 해묵은 일까지 끄집어내서 남자친구를 비난했다.
예전에 둘이서 화투를 친 적이 있었다. 나는 고스톱밖에 칠 줄 몰라서 남자친구가 새로운 게임(아마 섯다였을 것이다)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무척 태연하게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자기 손바닥 밑에다 화투패를 감추는 것이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지금 뭐하는 거냐고, 여자친구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하냐고 따졌다. 남자친구는 장난치려고 일부러 그랬다면서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후로도 몇 번 더 손바닥 밑에 패를 감추려고 했다가 나한테 걸렸다.
남자친구는 계속 장난이라고 주장했다. 패를 숨긴 걸 들켰을 때 내가 보이는 반응이 재밌다는 것이다. 나는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적당한 때 멈춰야 장난이지, 더 가면 그건 장난이 아니라 진짜 사기라고 경고했다. 비록 우리가 돈을 한 푼도 걸지 않고 화투를 치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남자친구는 적당히를 모른다. 계속해서 화투패를 숨기려고 하다가 화가 난 내가 화투 깐 이불을 뒤엎는 것으로 끝났다.
철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렇게 화를 냈으면 다음 판은 져줄 만도 한데, 또 내 캐릭터를 사정없이 짓밟고 신이 나서 어깨춤을 췄다. 나는 몹시 화를 내며 다시는 너와 철권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랬더니 다음 번에 가져온 게 모두의 골프였다.
나는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 축구 룰도 잘 모르는데 골프 룰을 알 리가 없다. 전혀 하고 싶지 않은 게임이었지만 억지로 했다. 물론 이번에도 남자친구가 계속 이겨나갔고 나는 이게 무슨 모두의 골프냐고, 너 혼자만의 골프 너나 실컷 하라고 짜증을 내며 관뒀다.
...쓰다 보니 내가 굉장히 화가 많은 사람 같다. 아무튼 우리는 게임 취향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남자친구는 애인을 사귀면 같이 게임을 하는 게 어릴 적부터 꿈이었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꿈을 이뤄줄 수 없다고 말했더니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게임을 가져와서 같이 하려는 시도를 했다. 물론 전부 실패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같이 게임하기’에 지쳤다. 결국 우리는 남자친구가 게임을 하면 내가 옆에서 구경하는 쪽으로 타협을 봤다. 실제로 내가 늘 지켜본 건 아니고, 내 할일 하다가 이따금 남자친구가 게임하는 걸 보며 한두 마디 던지는 편이었다.
남자친구는 같이 게임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갤러리가 있는 쪽도 좋아한다. 연애 초, 남자친구와 시내에 있는 큰 오락실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남자친구는 이런 저런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파라파라 댄스 기계로 달려갔다. 화면에 나오는 대로 두 팔을 이렇게 저렇게 마구 휘저었다. 그럼 센서가 팔동작을 감지해 점수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게임을 처음 봐서 너무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오락실에서 저렇게 거리낌없이 춤을 출 수 있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 남자친구가!
당시 남자친구는 굉장히 날씬했고 일에 찌든 지금과 달리 인물도 훤칠했다. 게다가 내 눈에 콩깍지까지 껴서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로 보이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춤 추는 뒷모습이 좀... 좀 그랬다. 별로 오래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렇지만 잘하기는 했던 모양인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기 시작했다. 여중생들이 남자친구의 팔동작을 뒤에서 열심히 따라하기도 했다.
남자친구는 부쩍 자신감을 얻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정말 해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나한테 가까이 와서 보라고 손짓했다. 내가 머뭇거리니까 내 이름까지 큰소리로 부르면서 오라고 했다.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 남자친구는 그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자신의 파라파라 댄스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제발 빨리 게임이 끝나길 빌었는데 노래가 어지간히 길었다.
마침내 게임이 끝났으나 남자친구는 영 아쉬운 얼굴이었다. 마치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한 판 더 하려고 지갑을 꺼내는 남자친구를 억지로 끌어다가 오락실에서 나왔다. 내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추억 중 하나다.
어쨌든 갓 오브 워, 언차티드 같은 게임은 옆에서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 그럴 때는 진심으로 게임에 빠져들어 감상한다. 그러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지루했다. 헤비 레인도 그랬다.
아무래도 남자친구가 게임 조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경꾼인 나의 재미가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헤매지 않고 쑥쑥 진도를 나가 스토리가 빨리 진행되면 재미있지만, 길을 못 찾아 갈팡질팡하면 금방 흥미가 떨어진다.
그렇지만 남자친구 본인에게 이런 말을 할 순 없다. 본인은 게임을 정말 잘한다고 믿고 있는데 내가 ‘너 게임 못함’이라고 말하면 상처를 받을 테니까. 남자친구가 이 블로그를 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앞으로도 절대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