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저번처럼 예전 일기를 꺼내어 본다
201X. 12.
알이 부화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거나, 부화한 것이 결국 새가 아니었다거나. 종종 그 알에 무언가를 적어놓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적힌 문장들이 언제나 그 내용물을 정확히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지시한 것과 각인된 것의 차이에서 불행의 씨앗이 자라나기도 한다. 그 것을 또 다른 불행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기회로 볼 것인지는 나름이겠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측과 엇나간 결과를 놓고 불행으로 해석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의 실패와도 비슷한데, 예정된 대로 어떤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행복해하기보다는 예정된 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의 고리가 연쇄하여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엇나감을 직면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잠재된 상태로서의 알을 사랑하기도 한다.
젊음도 마찬가지로 가능성으로 치환되곤 한다. 젊음의 과정은 지난하거나 어디론가 갈지 모르는 불안정성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라, 젊음의 결과를 통해 이루어낸 어떤 것을 이미 가정한 상태에서 - 좋은 사람을 만났다거나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거나 - 젊음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이루어낼 것이라 할지라도 딱히 차이를 보이진 않는다. 가능성의 시간들을 사랑하는 데에, 성취는 상상의 산물과 현재의 상황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루어낸 성취는 더 높은 성취를 기대하고, 이루어냈어야할 성취는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후회를 불러오기도 하므로.
그리고 오늘의 일기
지금도 역시 가능성을 사랑하고 성취 지향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가능성의 기대가 엇나간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즐겁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기대되지 않았던 부분에서 새롭게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업들이 사실은 가능성을 옭아맸던 경우도 있어서 '되는대로 살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 그냥 직접 부딪혀서 해보고 그 다음에 살펴보자'와 같은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어차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세계가 부여하는 가능성의 범위는 다르므로.)
모든 시점이 새벽에 머물러 있기를, 그래서 새로운 하루의 계획과 벌어질 일들에 대해 새벽에 상상하는 것이 치기 어린 나날의 시점이었다면, 지금은 이제 잠이 들어야할 새벽의 존재도 믿게 된 것 같다. 어떤 새벽은 일찍 잠이 든 결과로서 마음이 부푼 새벽이지만, 또 어떤 새벽은 하루종일 뛰어다닌 결과로서 어제를 찬찬히 돌이켜볼 새벽이기도 한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카페인을 섭취하면 아예 잠이 깨거나, 잠에 기절해버리거나 조금 극단적인 둘 중 하나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오늘은 묘하게도 둘다 일어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