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teemit.com/kr/@ravenclaw69/6bjcm8-1
에 이어서
1930년 11월 14일 새벽 후난성(湖南省) 성도(省都) 창사(长沙)시 육군교도소.
한 여인이 교도소 뜰로 끌려나옵니다. 간수들은 울면서 여인을 따라가려는 아이들을 막고 있었고, 사형 감독관은 끌려나온 여인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형 시킬 사형수에게 사정하는 감독관이라니?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들의 대화 내용은 좀 더 깹니다.
“양 선생, 한 어머니로서 정말 세 어린아이들을 버리려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부부관계를 끝낸다고 말하면 늦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하지마세요.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그의 혁명이 이른 시일 안에 성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믿음은 절대로 바뀔 수 없어요.”
“유언은 없습니까.”
“내가 죽은 뒤 일반인들이 하는 장례를 치루지 말라고 저의 가족에게 전해주면 고맙겠습니다.”
“마음 놓으세요. 내가 꼭 당신의 말을 양 큰 부인(楊老 太太)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세 아이들도 집으로 돌려보내 부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남편과 이혼만 한다면 사형을 취소하겠다는 사형감독관에게 "시끄럽고, 빨리 형 집행이나 하시오"라고 하셨던 이 분의 이름은 양카이후이(楊開慧)였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허베이성 베이핑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던 유명한 교육자 양창지(楊昌濟)의 딸이었습니다. 이 분의 남편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이었죠.
마오쩌둥은 동지이자 아내였던 양카이후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끔찍하게 아꼈다고 합니다. 특히 자신을 쏙 빼닯은 큰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가장 아꼈다네요. 그럼에도 그 아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지원서를 내자마자 즉각 허락합니다. 나중에 문화대혁명의 주역이 되는 마오쩌둥의 네 번째 아내인 장칭(江靑)등이 마오안잉을 뜯어말렸음에도 마오쩌둥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마오쩌둥의 아들이다. 죽음이 무서워 참전을 피한다면 어느 누가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겠는가.”
그리고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 24일, 미군의 폭격에 사망합니다. 뭐 중국만 이랬던 것은 아니에요. 당시 미국 현역 장성들의 아들 142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었고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죠. 142명 중엔 2차대전의 영웅이었던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35명의 아버지 중엔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프리트 (James Alward Van Fleet, 1892년 3월 19일 ~ 1992년 9월 23일) 소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쪽의 이야기들은 유독 구라빨이 좀 심합니다. 예를 들자면 마오안잉(毛岸英)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록이 꽤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마오쩌둥의 딸이자 마오안잉의 여동생인 마오리민(毛李敏)의 것입니다.
“큰 오빠(마오안잉)는 사령관 숙소에서 급한 전보를 받고 사인하고 있었다..(중략) .오빠는 전보를 등기하고 발송했다. 오빠는 담배를 피우지 못 했기 때문에 탄약상자에서 큰 사과 하나를 꺼내 먹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071103171)
마오인잉이 전사했던 당시 마오리민(毛李敏)의 나이는 15살. 열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전쟁터에 직접 갔을리 없으니 필히 누군가 이 이야길 전해줬거나 아니면 창작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마오의 수많은 여인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양카이후이(楊開慧)의 죽음을 극도로 미화하고, 오빠 볼 일도 별로 없었던 여동생이 마치 전장에 자신이 나갔던 것처럼 그의 죽음에 대해 영웅적 묘사를 하는 이유는 살아 있던 단 한 사람의 고뇌와 아픔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작용하지요.
‘카이후이의 죽음은 백번을 죽더라도 속죄를 할 수 없다(開慧之死, 百身莫贖)’고 마오쩌둥이 처가에 썼다는 편지도 상황을 알고 보면 확 깹니다. 마오는 이미 1928년부터 허쯔전(賀子珍,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 1909년 9월 20일생~1984년 4월 19일)과 동거하고 있었고, 1930년 양카후이의 사형이 집행된 뒤 둘이 결혼했거든요.
사실 중국 공산당이 자신들의 정사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감동을 100스푼쯤 먹이겠다고 덤비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중국공산당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멍청한 짓거리를 했던 장면들이죠. 양카이후이의 결연한 사형도, 마오안잉의 영웅적인 전사도 이런 덧칠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기죠.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라고 하면 보통 유명한 만화의 이 컷으로 기억들 하시죠.
이 장면은 대약진운동 당시 벌어졌던 除四害运动/除四害運動(4가지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운동) 중에 하나인 '농사에 해로운 새'(참새)를 잡아 죽였던 운동입니다.
참새가 해로운 새가 되었던 이유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마오저뚱 주석께서 현지 순시를 하시는데 마침 참새가 소중한 알곡을 먹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보이는 족족 참새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겁니다. 공산당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주석께선 직접 현지 지도에 나서서셔 저런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챙기는 자애로운 분이시다’는 거죠.
그러나 참새는 알곡보다는 벼에 달라 붙는 다른 해충들을 훨씬 더 많이 잡아먹는 새죠. 무엇보다 생태계 시스템은 워낙 복잡해서 하나만 제거한다고 그 생명체가 먹던 것이 갑자기 번성하진 않습니다. 참새와 연관된 먹이사슬 전체가 붕괴할 뿐이죠. 하지만 모든 것을 단순화시켰던 마오쩌뚱 주석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 덕택에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벌어졌던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기간 중 중국 인민 약 3천만에서 4천만명 정도가 굶어죽습니다.
문화대동란 이전에 벌어졌던 대약진 운동에서도 이런 역사 덧칠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중국 공산당이 정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진실’을 끄집어내는 것은 ‘영웅적인 서사’ 뒤에 있는 진짜 그림들을 찾아내는 겁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