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의 유명한 냉면집 을밀대. 뉴 밀레니엄 소리가 요란했던 2000년 무렵, 저는 촬영차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평양냉면을 40년 해 왔다는 주인장을 만나서는 흠칫 당황했습니다. 기대했던 평안도 사투리는 간데없고 토박이 경상도 말씨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가 맞는데. 나이 열 살에 이른바 ‘38따라지’ 가 되어 남쪽으로 왔고 대구에서 자라다보니 경상도 말이 입에 밴 것이죠.
.
고 김인주 할아버지 (을밀대 창업자)
.
대구 막창구이집에 어울리는 말투로 평양 냉면을 설명하는 건 그래도 어색했지만 그 어색함은 손님들과 어울리면서 풀렸습니다. 요즘의 을밀대는 백발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손님의 상당수는 백발 노인들이었습니다.
방송을 끝낸 뒤에도 저는 을밀대를 단골로 찾곤 했습니다. 아버지 고향이 함경도 쪽이라 그런지 그 이전 냉면은 주로 ‘원산면옥’이나 오장동 함흥냉면 쪽을 좋아했는데 물냉면의 맛을 익히게 해 준 첫 집이었거든요. 을밀대 이후에 저는 물냉면의 작은 마니아로 이곳저곳을 쏘다니게 됐고, 을밀대는 제 개인적 냉면의 원조집으로서 동료들 몰고, 정히 아무도 없으면 혼자서라도 이 집을 찾곤 했습니다.
.
.
그러던 어느 날, 근처에 들렀다가 을밀내 냉면 생각이 불쑥 솟아 발품 팔아 을밀대에 들렀습니다. 항상 하던 대로 ‘양 많이’(곱배기) 냉면에 식초 3초, 겨자 한 웅큼의 제 나름의 레시피(?)로 제조를 끝낸 뒤 폭풍 흡입을 시작하는데 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여느때처럼 냉면 가락을 젓가락에 수북히 말아서 누가 가로채기라도 할 세라 입이 터져라 집어넣는 게 아니라, 마치 체한 사람처럼 께작께작 냉면을 뒤척이고만 있는 겁니다. 주인장 할아버지도 조금 이상했는지 카운터에 앉아 “와 맛이 별롭니까”를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윽고 단골 손님 할아버지의 눈가에 갑자기 뭔가가 반짝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몇 줄기의 눈물이 냉면 사발로 떨어졌지요. 주인장 할아버지도 당황했던 모양입니다.
“아제, 뭔 일 있능교?”
“이번에 중국 갔다 왔댔소....”로 할아버지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 분의 고향은 평안북도 만포라던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에 맞닿은 곳이었습니다. 자식들이 큰마음 먹고 마련해 준 돈으로 중국인 브로커를 통해 고향 땅 가족의 소식을 알게 됐고, 중국의 단동시에서 압록강을 몰래 건너온 형제들과 만났다지요. 정확한 내막은 모르나, 할아버지는 이 말을 반복했습니다.
“만나지 않아야 했소.”
“나보다 10년은 늙어 보였다”는 막내 동생의 형편에 가슴이 아파서인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향에는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모를 일입니다만. 그는 압록강행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짧은 여행담을 끝낸 할아버지는 갑자기 깨작깨작 젓가락질을 멈추고 본연의 모습대로 냉면을 입에 퍼 넣었습니다.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몇 번의 주억거림으로 망울 속에 가두고 할아버지는 냉면을 비워 갔지요.
“내....고향이래 인차 이 냉면 속에만 이서...”
마침내 손님과 주인은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
그로부터 몇 달 뒤 저는 또 한 곳의 냉면집을 찾았습니다. 오류동의 ‘평양면옥’이었죠. 그곳에는 한 할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이 가게를 창업했던,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평안남도 출신 고집쟁이 노인의 아내였습니다. 할머니는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냉면의 맛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냉면은 말입니다. 삿자리를 뜨끈뜨근하게 해 놓고 그 위에 앉아서리 달달 떨면서 먹는 음식이야요. 그때가 제일 맛이 있디요. 이열치열이라 그래개지구서리 여름엔 더운 거 먹디 않아요? 겨울에 이가 시리게 메밀 면발 툭툭 끊어 먹구서리 뜨뜻한 육수 한 모금 마시면 대동강물이 꽁꽁 언대두 입 안은 살살 녹는다니까니.”
화제는 ‘피양 박치기’로 유명한 서북 사람 아니랄까봐 우렁우렁한 목청과 벼락같은 호통으로 평생 자신의 기를 죽였던 남편으로 옮아갔습니다. “쬐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문 아주 장비같이 호통을 쳐 댔디요. 육수 맛이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문 내다 버리기두 했어요. 지금 아들 녀석이 한다고는 하는데 길쎄요...... 아직은 그 맛이 안 나요” 느릿느릿 하지만 음절 하나 하나에 악센트가 똑똑 주어지는 평안도 사투리의 ‘니야기’(이야기)에 넋 놓고 빠져드는 참인데 주방 쪽에서 분위기를 뚝 끊는, 방송 용어로 “국어책 읽는 듯한” 서울 말씨가 들렸습니다. “엄마 내가 꼭 낼게 그 맛 내가 꼭 내고 만다니까.” 아버지 대신 주방을 맡은 아들이었죠.
.
이런 어색한 대사는 편집 때 어김없이 잘려 나가게 마련입니다.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살려 둘만큼 관대한 PD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다짐은 방송을 탔죠. 아들의 말꼬리에 따라붙었던 할머니의 대답 덕분이었습니다
“그래 00야. 꼭 내라. ......그 맛 네레 꼭 책임지고 내라.”
.
어느새 할머니는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몇 번씩이나 곱씹었습니다. 되뇌었습니다. “꼭 내라. 꼭 내야 된다.” 할머니에게 냉면은 요리가 아니었습니다. 갈 수 없는 고향이었고, 돌아간 남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고인이 된 남편의 사진 아래에서 육수 젓는 아들에게 네가 꼭 아버지의 맛을 내야 한다고 울먹이던 할머니 역시 고인이 되셨습니다. 그분뿐만이 아니다. 경상도 사투리 쓰시던 냉면집 을밀대의 주인장 할아버지도 끝내 꿈에도 잊지 못할 평양성 을밀대를 올라 보지 못한 채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성성한 백발이 육수에 젖지 않을까 저어될 만큼 냉면 그릇째 벌컥벌컥 들이키던 냉면집의 오랜 단골들도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을밀대를 촬영한 두 달 뒤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었고 평양면옥 할머니는 금강산 구경 갈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그 후 세월은 엄혹하고 차가웠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코 앞에 다가선 듯한 분위기에 많은 이들이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냉면집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겪어야 했던 전쟁의 공포, 이산의 아픔을 우리 아이들도 겪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무척 큰 요즘이었습니다. 천만다행히도 남북 정상회담 합의에 이어 북미정상이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의 소나기가 갑자기 퍼부어졌습니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부풉니다. 오늘은 평양냉면을 한 그릇 해야겠습니다. 그득 담긴 육수처럼 시원하게 남북의 닫힌 마음이 트이기를, 툭툭 쉽게 끊어지는 면발처럼 갈등이 해결되어 나가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두 분..... 평온한 곳에서 또 냉면을 말고 계시겠지요? 부디 후손들의 평화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