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성의 날입니다. 제가 만나지는 못하였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참 용감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옮겨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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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동 SOS 24> PD로 지내던 어느날, 저는 한 매맞는 '아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남편은 폭행의 잔인함과 무지막지함으로 따져서는 긴급출동 SOS 사상 1-2위를 다툴 걸물이었습니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도, 즉 말짱한 정신을 챙긴 상황에서도 무자비한 폭력 신공을 발휘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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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가장 심하게 폭행당했던 것은 내밀한 집안이 아니라 대로변이라고 했습니다. 이혼을 요구하자 법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법원 앞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직후 주먹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칼바람 휘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아내는 차가운 아스팔트에 뺨을 댄채 자근자근 밟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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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웠어요. 집안에서 맞을 때보다 더 무서워. 왜 그러냐 하면 난 거리에서 그렇게 맞을 줄은 몰랐거든. 누가 와서 도와 주거나 경찰이 곧 오거나 그럴 줄 알았죠.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는 거야. 사람들이 말려도 남 일에 참견 말라고 악을 쓰면 무서워서 가 버리고, 이년이 제비한테 홀려서 재산 다 말아먹은 년이고 새끼 학비까지 제비에게 갖다바친 년이라고 소리소리지르는데, 거짓말같이 사람들이 끌끌 혀 차고 가는 거야. 뭐라고 말도 안나와요 나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게 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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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법원이 바라보이는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빠진 아내에게 구원의 손길이 닥친 것은 정신없이 맞기 시작한 20분쯤 지나서였다고 했습니다. 한 당찬 아가씨가 남편의 폭력을 가로막고 나선 겁니다.
"신랑 앞에 딱 서서는 때리지 말라고, 한 대만 더 때리면 신고할 거라고 하면서 핸드폰을 들이밀어 남편 눈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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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가 찍혀 있었대나 봐요. 그 핸드폰 딱 쥐고 그때부터 우리 둘을 따라다니더라고. 남편이 골목으로 들어가니까 골목까지 들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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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 여장부가 의기 철철 넘쳐 흐르는 눈매를 빛내며 핸드폰을 높이 치켜든 채 남편을 위압하는 멋진 장면을 머리 속에서 편집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험악한 주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한 대 쳐 봐라 응? 하면서 차가운 미소를 머금는 대찬 처녀와, 그녀의 등장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의 얼굴을 교차 편집하다 보니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흐뭇한 감탄사를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약간은 뭐 이런 느낌?
"허허 참 대찬 아가씨였네요. " 그런데 아주머니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대찬 아가씨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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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면서 의아한 눈빛을 던지자 아주머니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그 아가씨 말리는 내내 파들파들 떨고 있었어요. 우리 신랑이 주먹을 쥐고 때릴듯 하면 주저앉아서 엄마야~~ 그랬다니까. 내 보기에도 나만큼 겁먹었던 거 같애. 핸드폰도 두 손으로 쥐고 있는데 바들바들 떠는 게 손에 보였어요. 그런데도 계속 뒤따라오는 거예요. 이빨 딱딱 부딪치면서 아저씨 때리지 마세요 신고할 거예요....... 신고할 거예요..... 하면서......"
처음에는 남편은 아가씨의 만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아가씨가 112를 기어코 누르고 예의 겁먹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위치를 알려 주는 지경에 이르자 아내에 대한 폭력을 멈추었고 골목길에 지하철 역까지 따라붙으며 아줌마를 놔 주라고, 안그러면 신고한다면서 '이빨을 딱딱 부딪쳤던' 가냘픈 처녀와 마누라를 놔 둔 채 자리를 떠 버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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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이름도 못물어 봤어요. 그런데 다시 만나면 막 웃으면서 물어볼 것 같아요. 도대체 무슨 용기로 날 구해 줬냐고....... 우리 신랑이 훅 불면 날아갈 거 같이 야리야리한 아가씨가 말이야..... 그런데 날이 지날수록 고마와져요. 힘도 없고, 겁도 많은 아가씨잖아요. 덩치 좋고 젊어 팔팔한 청년들도 많이 지나갔거든.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내 목숨을 구해 준 거예요. 오버한다고? 아니에요. 나 그날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길거리에서 그렇게 비참한 꼴 보이고 살아갈 기력 없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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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아주머니는 버스를 타거나 길을 가면서 그때 그 아가씨와 체격과 인상이 비슷한 이들을 보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라지요.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남편으로부터 비롯되는 죽음같은 공포를 몇 번 맛보았지만 그때마다 아가씨의 떨리던 목소리와 손을 생각하며 저항을 시도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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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를, 가냘프기 짝이 없고 대차기보다는 유약함에 가까운 아가씨가 드러내 준 용기가 한 사람을 바꾸었던 겁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주를 구한 것이다라는 격언에 진실성이 담겨 있다면, 그녀는 우주를 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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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맞는 아내 뿐 아니라 이 '젠장맞을' 세상에서는 너무도 부당하고 끔찍하게 '매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매는 육체적인 구타를 포함한 부당한 억압과 끔찍한 위협이며, 그 가해자는 비단 한 개인이 아니고 사회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 모든 꼬락서니를 목도하면서 거기에 끼어들고 함께 싸우고 막아 주기엔 내 처지가 너무 바쁘고 빈약하며 귀찮을 수도 있지만, 힘도 없고 결기도 빈약한 주제에 파들파들 떨리는 두 손에 받쳐든 핸드폰을 무기로 야차같은 폭력 남편에 맞섰던 여장부답지 않은 여장부를 떠올리면 문득 그 분주함과 나약함과 무관심이 슬몃 붉은 빛을 띠며 수그러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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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즐겨 읽는 편은 전혀 아니올시다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성경을 손에 쥘 때 찾아 읽는 대목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강도에게 습격당해 길바닥에 쓰러진 이를 그냥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인 역시 '겁나고 귀찮아서' 죽어가던 나그네를 피해 종종걸음을 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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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등장한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행동대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마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지"는 못할지언정 눈 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애써 눈 돌리거나 감지 않는 자상함을 조금씩만 더 가져 준다면, 그것이 이 세상을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세상'으로 바꾸는 첫 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 겁쟁이 아가씨가 한 사람을 구하고 변화시킨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에게 결코 작지 않은 형용사를 붙여 봅니다. 그분은 정녕 '위대한 겁쟁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