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진짜 똑똑한 사람은 글을 쉽게 쓴다”라는 문장이 종종 눈에 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모호한 문장과 어색한 수사 뒤에 숨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독자 역시 자신의 무지를 저 문장 뒤에 숨겨서는 안된다. 조금만 어려운 단어가 나와도, 조금만 문장이 길어져도 작가를 헛똑똑이로 만들어 자신의 부족한 어휘력과 독해력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해보자. 그가 아무리 쉽게 설명한다 한들 물리학에 무지한 사람에게 일상어로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는 상대성 이론을 잘 모르는 사기꾼이 되는 것일까? 오히려 수식없이, 고차원적인 개념 정의없이 물리학을 배우는 것이 더 어려운게 현실이다. 주제에 따라 정도는 달라지겠지마는, 어느 주제나 어휘의 수준을 낮출수록 내용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 문장 본연의 기능인 의미 전달을 위해 글이 어려워지는 것은 필연이다.
감정을 다루는 글이라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감정이야말로 섬세하여 정확하게 집어내기 어려운 것이다. 사전적 뜻이 같은 단어끼리도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기 마련이며, 단어를 구성하는 자음과 모음의 작용이 다른 느낌을 일깨운다. 글은 말과 달리 표정과 몸짓, 소리의 높낮이, 박자 따위가 표현하는 바를 오롯이 문자로만 나타내야 하므로, 더욱 구체적인 단어의 선택이 필요하다.
게다가 문장은 의미 전달만이 전부가 아니다. 마치 옷의 주기능이 체온 유지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문장에도 다채로운 장식이 필요하다. 쉽디 쉬운 어휘와 단문만을 사용해서는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없으며, 아무리 건조한 설명문이라도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 뻔한 문장 구조로는 독자에게 지겨움을 안길 뿐이다.
문장력을 기르려면 그 흔한 말인 very를 쓰는 것부터 줄여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에도, 실상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무지를 가리기 위해 글쓴이를 공격하고 있다. 정작 본인은 쥐뿔 모르면서 창작자를 깎아 내리는 것으로 우월감에 취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글에만 국한되지 않는데, 그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술 작품을 쓰레기로 취급하고, 저명한 영화 감독과 평론가들을 변태에 사이비로 깎아내리거나, 오페라나 뮤지컬 같은 종합공연예술을 돈지랄로 규정해 버리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무지란 대게 상대적이다. 지금처럼 다양한 분야가 분과되어 발달한 시대에 모든 방면에 소양을 가진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다. 으레 해당 분야마다 누군가는 가볍게, 누군가는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할 따름이다. 그래서 한 영역에 무지한 상태로 남는 것, 그리고 그 수준에서 호불호를 찾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문제는 모르는 것 자체가 아니라, 모르는 것을 자랑처럼 여기는 것이다.
얼마 전, 책 읽는 아이를 왕따시킨다는 요즘 아이들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책을 보고 있으면 젠체하는 양 보이고, 구식으로 취급된단다. 이에 기사를 접한 어른들은 한결같이 걱정스럽다는 반응이지만, 과연 “진짜 똑똑한 사람은 글을 쉽게 쓴다”라는 문장을 오용하며 자신의 무지를 뽐내고 있는 어른들은 무엇이 다른가. 상대가 무시한다고 느낄까 말을 삼가는 사람들의 침묵 속에 무지를 무기삼아 지식과 교양을 조롱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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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라고 표현했지만, 이미 말했듯 무지란 상대적인지라, 오히려 자신을 상식적이고 똑똑하다 여기는 사람들이 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 쉬울지 모른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을 그저 허영과 사치로 생각해 조소하던 앤디(앤 해서웨이)가 떠오른다. 무언가에 무심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함부로 무시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