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냐 방패냐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공격과 수비가 오가기 마련이다. 싸움의 정의상 공격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지만 그렇다고 수비가 빠지는 법도 없다. 수비 없이 서로 맞불만 놓는 싸움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을 경우에나 가능하다. 결국 한 쪽은 공세를 퍼붓고 다른 한 쪽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공수는 쉼없이 전환되고 그때마다 싸움꾼은 자신의 공격력과 수비력을 평가받는다. 공격 측은 화력을 높여 상대를 몰아붙이고 끝내 항복을 받아야한다. 수비 측은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 목표함과 아울러 상대에 비하여 체력을 아껴야 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으나, 이는 전의를 상실하고 웅크려버리는 경우에나 해당하는 말이다. 내가 공격을 위해 거리를 좁히면 나도 상대의 공격거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상대가 언제든 치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면 감히 함부로 결정타를 날릴 수 없다는 이치에서 문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혹시나 문자 그대로 수비를 버리고 공격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정말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면 메이웨더의 숄더롤은 그저 쓸데 없는 장난질에 불과한 것 아닌가. 수비는 공격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공격은 수비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공수는 매끄럽게 연결되어야 한다지만, 아무튼 공격은 공격이고 수비는 수비이다.
그렇다면 싸움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 우선하여야 할 능력치는 어떠한 것일까? 화끈한 공격력일까 아니면 끈덕진 수비력일까? 둘 다 균형 좋게 가지고 있다면 좋겠으나 인간에게는 시간의 제약이 있고 신체 피로도에 따른 한계가 있다. 우리는 우선 순위를 정해 싸움에 대비하여야 한다. 만약 여러분에게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 중 하나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조심스레 방패를 골라 보겠다.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교훈
브라질리언 주짓수(BJJ)는 1993년 UFC1에서 호이스 그레이시가 우승한 이래 실전 무술로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브라질 내부에서는 이미 엘리오 그레이시 대에서부터 유명하였으나 문화적 영향력이 큰 미국 시장에 입성하여서야 그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릴 수 있었다.
이렇게 강한 무술로 유명한 브라질리언 주짓수에서 초보 수련생에게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생존이다. 처음 흰 띠를 맨 수련생은 얼른 누군가를 꺾고 졸라 보고 싶어도 일단 살아남는 법을 우선하여 배운다. 특히나 BJJ가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무술을 표방하는만큼 생존은 BJJ의 정체성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기본적으로 수비와 생존은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의 전략으로서, 공세 대 공세로 맞붙었을 경우 더 크고 힘 센 사람이 이길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90세가 넘은 말년의 엘리오 그레이시는 젊은 수련생과 맞붙어 항복을 선언하지 않는 것을 수련의 목표로 삼으며 생존 자체를 자신이 승리로 여겼다. 브라질리언 주짓수계의 가장 큰 스승으로서 그는 거듭 생존을 강조했다. 브라질리언 주짓수에서 생존은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물론 모든 수련생이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아니다. 성향상 공격을 즐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이렇게 공격적인 사람은 자신보다 힘이 약한 상대에게는 무자비한 강력함을 보이지만 자신보다 조금만 더 강하여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힘으로 부딪혀 제압하던 버릇이 통하지 않으면 포기가 빠르다. 호랑이 같이 달려들던 수련생은 불리해지는 순간 어찌할 바 몰라하며 순한 양이 된다. 반면에 수비가 좋은 사람은 자신보다 상대가 약하든 강하든 꾸준한 실력을 보인다. 커다란 상대에 깔려 고비를 맞더라도 거북이처럼 단단하게 방어하고 끝내는 살아남아 엎치락 뒤치락 형세를 역전시킨다. 상급자의 입장에서도 후자의 수련생이 스파링하기 더 껄끄러우며 잘한다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공격적인 성향의 사람이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수련을 계속하며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 나가는 법이다. 수비력의 부족을 느낀 사람은 수비에 신경쓰게 되고, 공격력의 부족을 느낀 사람은 공격에 더 신경을 쏟게 되어 있다. 공격성은 결국 그 사람의 장점이 되고 자신만의 독특한 주짓수 스타일을 만들어 준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일단 살아남아야 기회가 주어진다는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교훈이다.
스타크래프트의 교훈
이 이야기는 비단 일대일 전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스타크래프트야말로 일단 살아남아야 기회가 주어진다는 교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임이 아닌가 싶다. 우주방어의 종족이라 하는 테란이 언제나 토너먼트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역대 스타리그의 우승자들만 보아도 테란이 얼마나 대단한 종족인지 잘 알 수 있다.
게임의 컨셉상 테란은 방어에 특화된 종족이다. 체력 60의 단단한 일꾼들, 무한 리페어로 절대 깨지지 않는 벙커, 시즈탱크와 마인밭까지, 제대로 자리잡은 테란의 방어진에 함부로 들이댔다가는 눈깜짝하는 사이에 모든 유닛들이 녹아버린다. 그래서 테란을 상대하는 타 종족은 굳이 본진까지 치고 들어가는 무모함보다는 병력만 소모시키고 굶어 죽이는 쪽을 택한다.
당연히 테란에게도 단점은 있다. 다음 자원 확장까지 진출이 어렵고 어설프게 진출했다가는 전투에 크게 패하고 본진에만 갖혀 버리는 수가 있다. 또한 유닛들의 기동력이 떨어져 전선이 확대되면 손이 극도로 바빠진다. 그리하여 세 종족 사이의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맞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테란의 막강한 수비력은 테란에게 gg를 치는 마지막까지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승리의 무게추를 더하여 준다. 다른 종족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역전 경기가 테란에게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까닭도 테란의 수비력에서 나온다. 테란은 끝내 죽지 않고 살아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누린다. 과거 패러독스에서 벌어진 임요환 대 도진광의 경기는 여전히 회자되는 대역전 경기였고, 최근의 이영호도 “‘이영호라면’ 모른다”는 말을 들으며 역전의 명수로 명성이 높다. 한번 경기가 기울면 뒤집기 어려운 공격 성향의 저그와 비교해 볼 때, 수비 성향의 테란이 갖는 장점은 뚜렷하다.
역사의 교훈
그렇다면 전쟁 게임이 아닌 실제의 전쟁은 어떠할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돌이켜보자면, 실제의 전쟁에서도 역시 수비가 중요하다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강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 국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수비력이란 스타크래프트처럼 종족이 특별해서 수비력이 좋았다는 말이 아니라, 지형적 특색으로 인해 수비에 용이했던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삼국통일을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본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농업 생산량도 떨어지고 군사력도 부족한 무엇하나 앞서는 것이 없는 약소국이었다. 하지만 신라는 소백산맥이라는 천연의 요새 덕분에 최종적인 삼국통일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어느 나라나 시기에 따라 부침을 겪기 마련이지만, 방어가 좋은 국가는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부활할 여지가 있는 반면, 방어가 약한 국가는 기회를 틈 탄 외세의 침략에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한고조 유방이 파촉 땅을 기반으로 초패왕 항우를 이겨냈던 일과도 유사하다. 파촉은 원래 항우가 진을 멸하고 봉지를 나누며 유방을 유배보내듯 보낸 험지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파촉 땅은 유방을 한고조로 만들어준 훌륭한 발판이 되었다. 한때 유방은 팽성전투에서 항우에게 대패하며 목숨만을 건져 도망갔으나, 그가 가진 파촉 땅은 누구도 침략할 수 없는 땅이었고, 그는 파촉으로부터 징발한 군과 식량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유방은 언제나 항우에게 전투에서는 패하였음에도 이로써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현대로 넘어와 지금의 강대국을 보아도 본토 수비에 용이한 지형의 국가들이 많다. 바다를 건너야만 침략이 가능한 일본과 영국, 그리고 미국은 인류의 역사 초기 변방 중에 변방에서 현재에는 그 어느 나라보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가 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의 사례를 볼 때, 돌고 도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국제적 패권을 가지기 위한 조건으로서, 강력한 수비력은 충분조건은 못되어도 필요조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사실은 그냥 내 마음대로
사실, 앞서 장황하게 창보다 방패를 택해야 하는 이유를 떠들어 보았지만, 탄탄한 근거가 있어서 한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시쳇말로 ‘뇌피셜’에 불과하다. 따지고보면 무수한 반례를 찾을 수 있는데, 첫째로 MMA의 역대 챔피언들을 보자면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케인 벨라스케즈, 호세 알도, 코너 맥그리거 등은 살벌한 공격력으로 유명한 파이터들이었다. 화끈한 화력이 그들의 치명적 매력이자 장점이다. 둘째로, 스타리그에서 테란 뿐 아니라 저그와 프로토스도 우승을 몇 차례 차지한 바 있다. 음.. 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테란이 좋은건 맞는 듯하니 넘어가자. 여하튼 셋째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점령했던 징기즈칸의 본거지는 몽골평원이었고, 나폴레옹은 너른 평지의 프랑스 땅으로부터 뻗어나갔다. 예시로 들었던 파촉땅도 귀큰놈 유비가 근거했던 곳이었으나 위촉오의 삼국지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내가 수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근거를 수집한 데에는 현재의 내 마음이 그것을 바라는 탓에 원인이 있지 않은가 싶다. 전문용어로는 확증편향이라고도 하는데, 즉 내가 원하는 바대로 보고 원하는 바대로 느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풀매수, 풀매도로 원금 까먹지 않고 안정적인 분할 매수, 분할 매도로 성투하고 싶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