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벌벌 떨며 걷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건냈다. 할아버지였다. " 학생, 강서소방서에 가야 되는데, 버스 정류장이 어디있는지 알려 줄 수 있을까?" 할아버지 부탁치고는 정중하고 공손했다. 마침 나도 버스 정류장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저도 그쪽으로 가요, 저 따라오시면 되요." 할아버지는 한걸음 물러서서 나를 뒤따라온다. 나도 할아버지 걸음을 생각하며 걸음을 한발짝 늦춘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강서소방서로 가는 버스 번호까지 알려준다. 귀찮았지만 해야할 일을 했다는 생각에 조금 뿌듯했다. 할아버지께 간단한 목례를 하고 내 갈 길을 가려는데, 할아버지가 멈춰 세운다. 할아버지가 만 원 지페 한장을 내 손에 쥐어준다. 고맙다면서.
만 원 지페 한장을 손에 쥐는 순간, 나는 얼음이었다. 어안벙벙. 다시 정신을 차린다. "할아버지, 괜찮습니다." 나는 만 원 지페 한장을 할아버지에게 돌려주고 도망간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길바닥에 버려진 음료수 캔을 걷어차며 감정을 어루만져 본다. 할아버지를 괜히 도와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 나는 멀찍이 뒤돌아서 할아버지를 쳐다본다. 할아버지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참는다. "할아버지, 고마우면 따뜻한 덕담 한마디를 건네셨어야죠." " 왜 고마운데 돈을 주세요." 나는 할아버지가 건넨 만 원 지폐 한 장에 모욕감을 느낀다.
그런데, 5분 뒤, 만 원이 아깝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만 원이 결코 작은 돈이 아닌데... 너무 생각도 없이 거절한 게 아닌가 싶다. 할아버지도 내게 고마움을 표시한 거뿐인데... 아깝다는 생각을 넘어서 후회의 감정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음료수 캔을 다시 한번 걷어찬다. "아, 그냥 돈 받을껄"
마음을 가다듬는다. 다시 상황을 돌아본다. 나는 왜 만 원을 받지 않았을까. 나는 왜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에 화가 났을까. 나는 어려움에 처한 할아버지(약자)를 도와드렸고, 이는 인간의 도리이자 도덕을 실천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던 내게 '경제적 유인'을 제공했다. 도덕적인 행위에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다니. 이는 도덕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그렇다. 나는 돈보다 도덕이, 돈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믿고 싶다. 돈이 종교가 된 세상. 나는 싫다.
"그래, 내가 옳은거지." 나는 자화자찬을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군대에서 '언행불일치 남자'로 유명한 내가 오랜만에 '언행일지 남자'가 된 거 같다. 부모님한데, 친구들한데 자랑해야겠다. 오늘 겪은 일을 글로 한번 써봐야겠다 싶었다. 뿌듯함이 밀려온다. 그런데 뿌듯함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에, 만약에 할아버지가 만 원이 아닌 십만 원, 백만 원을 내 손에 쥐여줬다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상상만으로 공포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