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랑 – 엠(M)
이번 기회에 프리츠 랑의 대표작 M을 다시 한 번 감상하게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가 1931년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화의 완성도나 영화의 외면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연기는 마치 7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출연한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를 보는 것과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속에서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아이들을 사탕이나 풍선으로 유혹을 한 후, 살해한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도시는 혼란에 빠진다. 영화 속에서 이 도시가 베를린인지? 아닌지는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범인은 당돌하게도 신문사에 자신이 적은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경찰에서는 이 범인을 잡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지만, 범인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역시나 또한 범인은 살인을 계속 저지른다.
영화의 초중반 감독 프리츠 랑은 범인을 아주 화면 속에 드러낸다. 범인이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어린이 살인범, 한스 베케르트를 연기하는 피터 로레의 얼굴이 화면에 드러난다. (헐리우드의 황금기 시절의 영화를 자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사람은 “카사블랑카”와 “말타의 매”에서 험프리 보가트 옆에서 알짱대던 연기를 했던 바로 그 눈 크고, 키 작은 그 배우이다.) 영화에서 이미 범인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초점은 누가 범인인가? 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저 놈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로 옮겨 가게 된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가 범상치 않은 걸작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범인 한스 베케르트가 어린아이를 죽이는 범죄를 저지른 이곳은 다름 아닌, 독일의 베를린으로 보여 지는 도시이며, 이곳의 시간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에 배상금을 물기 위해서 악바리처럼 악귀들처럼 돈을 모아서 빚을 갚던 “무서울 정도로 성실한” 시민들이 살던 곳이며, 나치당이 슬금슬금 독일 사회 전면에 자신들의 마수를 뻗치고 있는 그러한 곳이다. 다시 말해서 무서운 인간들이 악으로 분노로 살던 곳이 이 곳이다.
영화는 그러한 인물들의 면면을 마치 캐리커쳐를 그리듯이 과장되게 묘사한다. 하지만 이 캐리커쳐에는 진지함과 살기가 묻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작품처럼 웃기기도 하면서 보는 순간 흠칫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이런 묘사는 일반 시민이건, 혹은 경찰집단이건 간에 차이 없이 드러난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살인자를 잡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는데, 그 방법이 우악스럽고, 무시무시하다. 일단 경찰의 경우, 야밤의 어떤 깊은 시간이 되자, 그야말로 무슨 철문으로 공간을 완전히 밀폐시키듯이 장소를 밖으로부터 봉인시켜버리는데, 철창이 각각의 가계의 문에 떨어지며, 가계 안의 손님들은 가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안의 시민들은 씩씩대며 분노하면서 경찰에게 자신들의 신분증을 건넨다. 씩씩대는 경찰과 분노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한 대로 어우러지는데, 혼돈의 도가니 그 자체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시민들은 경찰의 신분증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아들인다.
경찰의 이 같은 막무가내 식의 단속이 밤마다 계속되자, 사람들이 밤에 거리를 걷는 것을 자제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불경기 속에서 장사는 더욱 안 되게 된다. 시민들은 자경단을 조직한다. 자경단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의 조직 구성력은 경찰 뺨치게 대단하다. 일단 시민 자경단은 거리의 거지를 불러 모아서 하나의 조직적 감시체계를 만들어 서로 보고하게 만든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행동력과 치밀한 사고,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가 합쳐지자 피터 로레가 연기하는 한스 베케르트는 곧 벽 앞으로 몰린 쥐 마냥 코너로 몰리게 된다.
시민 자경단은 베케르트의 범인 현장을 추적하는데, 한 명의 자경단원이 어린아이를 납치하고 있는 순간에 있던 베케르트의 등에 “M”이라는 문자를 새긴다. 그리고 베케르트는 어린아이로부터 등에 무엇이 묻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자신이 범인임을 사람들에게 들키게 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베케르트는 한 건물로 숨어 들어간다. 그러자 자경단은 마치 앞선 경찰들이 그러했듯이 그 건물을 통째로 폐쇄 시켜 버린다. 아예 베케르트가 그곳에서 나올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이 장면도 상당히 놀라웠다. 이 곳 시민들은 압도적으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헐리우드라든지 혹은 여타의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와는 차별점을 보여주는 지점이었다. 이 곳 사람들은 하나의 집단체적인 의식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의견을 공동체 속으로 수렴시키는 방법과 하나로 이루어진 집단이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행동을 구현하는 방식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사람들은 베케르트를 지하실로 잡아들이고, 그곳에서 그들 나름의 심문을 시작한다. 어떤 장소에서 촬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실 공간도 무시무시한 깊이감이 있다. 둥근 형태의 돔과 같은 지붕이 지하실의 윗부분을 장식하고 있고, 그곳에서는 도시의 시민들이 모두 모여 있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끌려온 베케르트를 바라본다. 영화는 2초에서 3초? 정도 되는 시간에다가 소리 없이 카메라가 팬 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비춘다. 이 장면은 베케르트의 포인트 오브 뷰, 시점샷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관객은 이제 어쩔 수 없이 한스 베케르트의 시점으로 이 분노한 시민을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는 한스 베케르트가 죽일 놈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한 번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고는 말하는 듯하다. 범인이 내뱉는 말은 물론 궤변이고, 그의 말이 그가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 시켜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말 중에서 하나는 진실같이 들리기도 한다. “나를 경찰에 넘겨라. 당신들에게는 나를 이렇게 할 권리는 없다.” 사실이다. 시민들이 베케르트를 잡아다가 그들 스스로 공권력을 자의적으로 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노하고 있다. 자식 잃은 부모의 상실감과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여기서 보는 관객은 이 두 집단, 자경단으로서 공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집단과 죄를 저질렀지만, 그 죄를 공권력을 통해서 받겠다는 죄인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보게 된다.
이러한 궤변 속에서도 변호인은 존재한다. 그는 이러한 미치광이 재판 상황에서도 이성을 놓고 있지 않는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견 역시 대중의 분노에 찬 광기 속에서 길을 잃는다. 베케르트는 다시금 말한다. “나는 누군가에 쫓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일을 순간적으로나마 잊을 수 있는 일은 범죄를 행하는 일이었다. 그 순간만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행했는지 알지도 못했고, 이미 범죄가 저질러져 있었다.” 궤변이다. 하지만 이 궤변은 우습게도 분노한 시민들에게도 속하는 듯이 보인다. 시민 집단은 그들이 지금 지하실에서 무슨 짓을 하는 지 잘 모르고 열광하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은 지금 집단적으로 하나의 이념에 휩싸여서 한 명의 죄인을 고문하고 있는 것 같다. 타자의 도래이다. 베케르트는 타자가 개인적 차원에서 드러났다. 그와는 다르게 시민 집단에서는 타자가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다수의 차원에서 드러났다. 타자는 꼭 한 명의 개인화로 드러나라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집단으로 드러나라는 법도 없다. 타자는 어떤 형태로든지 드러날 수 있다. 사유하고, 생각하지 않는 대상들에게 있어서 타자는 일단 드러나고 본다.
광기에 찬 하나의 재판이 절정에 다가갈 무렵, 진짜 공권력을 가진 경찰이 이 지하실로 들이닥치고,(시민 집단에서 한 명을 심문해서, 지하실의 위치를 알아낸 후, 범인을 강탈하려는 얍삽한 술수를 부린 도둑 같은 경찰이다.) 재판은 막을 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아이를 잃은 피해자의 부모로 추정되는 아낙네 한 명의 깊은 탄식 섞인 울음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런다고 죽은 아이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영화는 위력적인데, 영화의 절정에 치달으면서 더욱 그러하게 변하게 됨을 느꼈다. 이 영화를 당시 독일의 상황과 떨어뜨려 놓고서 생각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 영화는 인간의 분노가 어떤 하나의 계기를 통해서 극에 이르게 되고, 그 극에 이르게 된 사람이 하나의 집단을 만들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이 유발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한 명, 혹은 집단이 하나의 광기에 휩싸이는 하나의 진정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사회적이고, 또한 과학적으로도 보인다. 놀라운 작품이고, 이 영화가 1931년도 거지 반 80년이나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영화이기도 했다. 고전이나, 클래식이라는 수식어를 제쳐 놓고 순수하게 영화만으로 지금 보아도 흥미롭고 재밌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