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물질화- 이식된 기억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
기억 이식을 통해 이성호의 정체된 삶에 변화가 나타난다. 소설에서 기억의 이식은 부정적이기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서하숙에 따르면 기억을 이식받았다 해서 전적으로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기억을 쉽게 잃어버리기 때문에 기억 이식에 대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방편으로서 인공적인 기억의 이식은 기억이 가진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서하숙은 천수만에서 기억 이식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꺼낸 후 돌아와서 ‘인공기억이라 하더라도’ 기억은 있어야 한다며 기억 이식 서비스에 대해 말한다. 이때 기억이 회복될 때까지만 타인의 기억을 빌려 쓰기로 하는 것이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서하숙의 생각은 그녀가 이미 기억 이식의 경험이 있거나 그와 관련되어 특별히 알고 있는 비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M들이 벌이는 사업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소설이 쓰여지던 21세기 초입에 네트워크화 사회로 급격하게 이행하던 한국의 현실은 기억의 상실과 기억 판매 사업의 번성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공감가게 그려진다. 당시 한국 사회가 가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으로 융합적인 시간을 사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디지털화와 인터넷 통신의 확산은 인간의 기억을 거래 가능한 물질이 되게 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듯이 필요할 때 기억을 이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주민등록증이나 신용카드나 백화점 카드를 잃어버리고 나서 재발급 받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일이에요. 어쩌면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의 당신보다 지금부터의 당신이 더 중요한지도 몰라요. 그쪽은 당장 이름도 없잖아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예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이 대리인을 구해서라도 삶을 유지하기 위해 기억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기억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식돼서 기억의 원주인의 삶을 연장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은 물질로서 소유자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후에도 타인의 뇌에 저장되어서 지속적으로 삶을 연장시킨다는 생각은 디지털 시대에 기억이란 계속 변화하고 생성되는 것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기억 이식에는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들이 요구되는데 일종의 거래로서 기억 이식은 법적인 절차를 따른다. 이 과정에서 공증사무소에서 중개인 자격으로 M이 모든 절차를 처리하며 법적 절차에 드는 비용은 의뢰인과 수뢰인 양측이 나눠서 지불하는 방식을 취한다. 위탁자 본인이나 중개인이 기억을 이식받을 사람을 선택해야 하며 수뢰인이 만약 기억을 회복하면 중개인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 타인의 기억이 이식되었을 때 자신의 기억을 회복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하면서도 이성호는 기억을 이식 받기로 결심한다.
윤대녕의 소설들은 자아 정체성을 탐색하는 계기로 자주 기억의 모티프를 사용해왔다. 이 소설은 기억상실이라는 사건 자체를 서사 구도의 중심에 놓으면서 자아 정체성을 재구성하기 위한 탐구 여정으로 여행과 기억의 모티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기억 상실을 다룬 윤대녕의 다른 소설들과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윤대녕 소설 속 인물들은 종종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거나 일시적 망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연한 계기로 인해 자신의 옛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기억은 삶을 자유롭게 해주고 생필품처럼 필요한 물품이다. M은 이성호에게 기억이란 일종의 환상같은 것이지만 사람은 기억에 의지해 살게 돼 있으며 기억을 이식받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서하숙도 기억의 물질성에 대해 생필품처럼 필요한 것 중 하나일 뿐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처음 기억을 이식한 후 며칠 간 이성호는 심리적인 공막감을 느끼고 이틀간의 긴 잠에 빠진 후 깨어나서 세상이 완전히 변해버린 듯한 느낌을 지각한다. 기억 이식 중 그는 심한 구토 증세와 동공이 돌출할 듯한 아픔과 기억의 파편들 -낯선 거리 풍경들, 어두운 영화관, 비가 내리는 골목, 창백한 어떤 여자 얼굴, 부서진 노란 차, 모래시계가 놓여있는 책상, 아이스크림 –을 보게 된다. 그는 고통스러운 기억 이식 시술을 받은 다음 한동안 몸과 마음을 끼워 맞추는 데 애를 먹고 우울증세를 느끼지만 한편 M과 서하숙이 말한 대로 삶에 대한 의욕도 느끼게 된다. 그는 기억을 이식받은 후 자신의 기억과 이문구의 기억이 혼융되어 있는 상태가 된다. 이문구가 들르던 술집을 찾아간다든지 레코드 가게로 가서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 레코드를 구입한다든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비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의 구분을 떠나서 결과적으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음을 기대하게 해준다.
중개인이 말했듯이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삶에 대한 의욕도 되찾는다. 하지만 이식된 기억은 흐릿한 영상들로 눈앞에 가끔 돌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식으로 ‘편집을 하고 남은 영화 필름처럼 연관성 없이 뒤섞인 채’ 뇌 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후 그는 강남의 씨네마 타운이라는 곳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찾아 가고 자신도 모르게 모델이라는 술집에 가서 영상 속에 나타났던 여자를 기다린다.그는 이명구의 기억에 의해서 최면에 걸린 상태가 된다. 이후 다시 술집에 찾아 갔을 때 그는 차수정을 보고 감정적 혼란을 겪는다. 이식받은 기억은 그의 감정을 조종하게 되며 자신이 이문구의 기억을 이식받았던 백궁역 옆 무인호텔에서 다시 만나 그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삼십이 년만의 폭설이 내리던 날 그는 차수정과 다시 만난다. 흰 알약을 먹고 이문구가 죽던 날을 회상하고 난 후 그녀는 절망적으로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녀의 자살은 이문구가 죽기 전에 프로그래밍해놓은 것이며 그녀는 죽음으로 삶을 계속하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성호가 아닌 이명구에게 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식된 기억은 M의 말과 달리 부작용을 일으키는데 사이보그처럼 기억을 이식한 후 이성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하게 되고 이문구의 기억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다. 마치 이문구의 최면에 걸린 자처럼 삶이 부분적으로 지배당하는 것이다. 타자의 기억 덕에 새 삶을 살게 되었으나 그를 지배하는 이문구의 기억은 뜻하지 않게 차수정의 죽음을 지켜보게 만든다. 타자의 기억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부작용에 대해 알게된 M은 이문구의 기억 파일을 삭제하기로 결정한다. 타인의 기억은 이성호가 이명구가 누구인지 알고 싶게 만들고 뜻하지 않게 차수정의 죽음의 여정에 동반자가 되게 하면서 결국 삭제당하고 만다. 이문구는 그가 기억 양도를 택하면서 의도했던 바와 달리 시스템의 통제하에서 소멸되고 만다.
사슴벌레 문신
소설에서 기억 이식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사업으로 거래되고 이 사업은 인간을 사이보그화해서 통제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M들이 기억을 거래하는 방식은 인터넷상의 사슴벌레 판매 루트를 통해서다. 또한 사슴벌레 문신은 기억을 이식했다는 증거다. 무인 호텔에서 기억을 이식받은 후 집으로 돌아온 이성호는 서하숙에게 갑자기 반말을 한다. 그는 자신이 스물여덟 살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기억은 그가 나이에 대한 감각을 달리 갖도록 만들었다. 자신이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스스로에 대해 알고 싶어 하기 보다 이식된 기억의 주인 이문구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달라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이문구가 준 신용카드를 들고 은행에 가서 현금을 인출하기도 하고 서하숙을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과 음식도 사주기도 한다. 그 다음 그녀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다. 이식된 기억은 삶의 감각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잃어버린 그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재작동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성호는 이문구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이 공존하는 혼란스러운 시간을 살아가야 만 하게 된다. 그는 기억 이식으로 혼란을 겪지만 기억은 잃어버린 삶 속에서 자극이 되는 변화를 야기하고 서하숙과의 관계를 한층 친밀하게 해준다. 어느날 그녀는 과거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준다. 나이 많은 부모는 그녀를 고장 난 텔레비전 혹은 컴퓨터쯤으로 취급했다. 아버지는 부동산업으로 돈을 꽤 모았고 어머니는 백화점 문화센터 꽃꽂이 강사로서 남들 보기에는 이상이 없는 가족이었지만 사실 그녀는 부모의 무관심과 매일 밤 아버지의 폭력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후 재수학원에 다니던 무렵 문득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의아해하다가 가출을 감행한다. 이후 극장, 당구장, 록카페, 롤러스케이트장, 노래방, 비디오방을 전전하다가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잘 정도로 고생을 겪는다. 분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아이디어가 떠올라 시작한 라면 조리법을 개발하는 일은 다행히도 적성에 맞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과거란 잊고 싶은 날들이며 현재 속에서 그녀는 전자제품을 가족 삼아 지낸다.
“전 말이죠, 컴퓨터가 너무 좋아요. 또 냉장고와 휴대폰과 신용카드도 마찬가지구요, 그것들이 없으면 전 하루도 살아갈 수 없어요. 밤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요. 커다란 남자가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그녀에게서 연민과 애정을 느끼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묘한 생동감과 천진함 속에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날 덕수궁 옆 편의점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며 이성호는 그녀의 곁에서 살면서 기억을 다시 만들어 나가기로 한다. 그는 이문구의 기억에 이끌려서 차수정을 만나게 된다. 집에 돌아와서는 서하숙에 대한 감정을 쌓아 가지만 동시에 밖에서는 우연적으로 차수정을 만나게 된다. 서하숙은 히아신스 꽃이 활짝 벌어질 무렵 앓기 시작하다가 꽃이 말라 떨어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일이후 서하숙은 이성호를 만리장성에 데려 간다.그녀는 만리장성에서 M을 만난 적이 있지만 그날 있었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양복에 똑같은 모자를 쓰고 다녀요. 구두와 넥타이도 마찬가지고 심지어는 표정도 다 똑같아요. 얼굴 생김새만 좀 다를 뿐이죠. 그쪽이 기억을 이식받던 날 무인 호텔에서 나오는 M을 보았을 때 그래서 그가 여러 M들 중 하나라는 걸 알았어요.(...) 홀 안으로 들어갔더니 아까 말한 M들이 앉아 있더군요. 다른 손님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그들은 한결같이 난자 완스에 이과두주를 먹고 있었어요. 끔찍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들을 하고 말예요.”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M들은 그녀를 성폭행하고 기억을 빼앗가 갔는데 그는 처음엔 그녀가 꿈을 꾸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하숙은 기억나는 것을 모두 고백한 다음부터 의욕을 내어 라면 요리책을 쓴다. 서하숙의 잃어버린 기억과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 소설에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의 모호성 속에서 M으로 상징되는 기계인간들의 개입은 디지털화 시기에 기계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M에 대한 이성호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의문의 대상으로서 수시로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수수께끼같은 존재로서 이들은 위협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해로운 존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하숙의 말대로 그들은 똑같은 복장을 하고 똑같은 표정에 말투까지 닮아 있으며 사업상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의 일원들이다. M은 이성호를 찾아와서 차수정의 죽음 이후 이성호에게 의뢰인의 과거에 대해 알려 해선 안된다는 조항을 위반했다면서 주의를 준다. M에 대한 이성호의 마지막 기억이다. 자신은 프로그램상의 명령에 의해 움직였을 뿐이라고 항변해도 M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다면서 어쨌든 이명구의 기억을 삭제하겠다고 말한다.
“애초에 기억 이식 프로그램을 만들 때 저희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기 때문에 남의 기억을 이식받았다고 하더라도 감정의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습니다. 감정도 기억의 소산이기 때문에 기억이 이식되면 결국 느끼는 감정까지 이식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기억과 감정을 분할하는 시스템을 다시 개발해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간혹 부작용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객관적인 정보 외에 일부 의뢰인의 감정이 이입되는 현상 말입니다.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시스템은 고감도 최신 프로그램입니다. 또 하나 기억 이식시 수뢰인의 의식이 강하게 반발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억 프로그램은 의뢰인의 기억이 수뢰인에게 이입되는 현상을 나타내거나 수뢰인의 의식이 기억 이식 시 강하게 반발하는 경우를 발생시키는 등 불완전한 상태다. 이성호는 이문구의 기억이 사라지는 데 대해 일시적으로 저항감을 품게 된다. 이성호에게 기억이란 존재를 규정짓는 것이기에 타인의 기억일지라도 기억이 삭제되는 것은 그의 존재에 위협이 된다.
기억 이식 후 이성호는 자신을 감시하는 M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된다. 그 증거는 그의 어깨에 난 사슴벌레의 문신이다. 그는 얼마 후 서하숙의 몸에도 같은 문신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서하숙 역시 과거에 기억 이식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을 이식받았으나 이 사실을 숨겨왔다. 서하숙의 문신은 그녀가 이식받은 사람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의 관리 하에 살고 있음을 말한다. 문신은 사슴벌레 판매루트를 통해 기억 이식 사업을 해온 M들의 통제 장치로서 사업을 수행하는 M의 태도는 철저하게 기계적이다. M은 오류가 일어날 것을 미처 체크라지 못했다면서 원할 경우 또 다른 의뢰인의 기억을 추가 비용 없이 재입력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성호는 더 이상 이식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였는지라는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풀려났다. 인공 기억의 덕으로 더 이상 잃어버린 기억을 문제시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얼마 후 그는 영화관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회사 동료의 덕에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에게 집은 결코 행복한 곳이 아니다.가족들은 그에게 이전에 일어난 사실을 알려 주지만 그는 기억해 내지 못한다. 결국 이전의 그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서하숙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성호가 과거를 짐작하게 되었지만 그 자신이 누구인지, 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를 끝내 미스터리로 남기면서 작가는 기억 상실증을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바깥’의 영역에 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청 역에서 깨어나기 전 이성호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끝내 기억해낼 수 없게 하면서 우리가 알아낼 수도 생각해낼 수도 없는 불가능한 지점으로 남겨둔다.
서하숙과 나는 타워호텔 앞에서 종로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나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둠은 점점 깊어만 갔고 잊혀진 꿈처럼 3월의 마지막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떨고 서 있는 키 작은 여자의 손을 거머쥐며 나도 모르게 구구, 비둘기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결말은 기억을 잃고 이식된 기억으로 현재를 끌어안고 살아야 할 용기를 강조하면서 이성호가 서하숙의 손을 잡으며 비둘기 소리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소설의 결말은 두 사람의 재회가 앞으로 서로에게 의지해서 다시 살아가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기에 슬프지만은 않다. 기억이란 누구나 잃어버릴 수 있고 누구나 이식받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이식은 결국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수단이 아니라 현재를 다시 살게하는 방편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과거란 결코 규정지어질 수 없는 것이며 기억을 되찾든 상실하든 그러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정지된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성호는 서하숙의 말대로 인공적인 기억 이식의 방편을 택했다. 삶의 방편으로서 기억 이식술은 현실적 역량을 강조한다. 기억이 물질성을 띠면서 인공적으로 이식 가능한 대상으로 나타나고 인공기억이 실제로 장점과 단점을 갖는 것은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컴퓨터 파일 형태의 메모리가 된 기억, 복제, 변조를 통해 변화하는 기억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디지털 시대에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규정 짓는다. 디지털적 기억은 아날로그적 기억과 달리 자아의 근본적인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다. 소설에서 말하는 디지털 시대의 기억술은 과거의 상실 이후 과거를 빈 곳을 메꾸지만 타자의 기억을 끌어 들이고 대체하면서 새롭게 창조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즉 기억이 테크놀로지로써 재창조되는 측면이 이 소설에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