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낌새가 보이더니
결국 화를 품은 글루미가 찾아왔다.
글루미가 찾아올 때면
이 세상은 좋은 것 하나 없이
다 나쁜 것 투성이로 바뀐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
‘분노를 대하는 방법’ 편을 보면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의 사례가 나온다.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르 가라않을 때까지.”
그래서 나도 남편과 두 녀석을 내버려둔 채로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이 상태로 집에 있다간
누구하나 봉변을 당할 것 같아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가지 말라고 울어대던 첫째녀석의 목소리가
자꾸 내 귓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첫째녀석만 데리고 나왔다.
‘이참에 첫째녀석과 함께
시간이나 때우고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사람 북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맘속의 소용돌이가 한층 잠잠해졌다.
재래시장에서 제일 처음 간 곳은
설빙이었다.
딸기를 좋아하는 첫째녀석의
기호를 반영해 딸기 빙수를 주문했다.

빙수를 맛있게 먹으며 대화하고 있는
여느 연인들과 같은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첫째녀석은 딸기만 열심히 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그 덕분에
나 혼자 빙수 한 사발을 들이켰다.
5월이지만 바깥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졌다.
그 다음으로 첫째녀석이 좋아하는
카봇 티셔츠를 사고,
손 칼국수 집에 가서
오뎅칼국수와 수제비도 먹었다.
재래시장을 구경하며
음식을 보고 있으니 가족 생각이 났다.
‘이거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인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 나와 함께 있어줘서 고마운 마음에
첫째녀석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졌다.
문구점에서 맘에 드는 걸 고르라고 하니
후다닥 골라서 들고 온다.
첫째녀석은 장난감을 들고 가는 내내
싱글벙글댄다.
갑자기 “엄마, 사줘서 고마워~
엄마, 참 맘에 들어” 이러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엄마야 말로
네가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두 녀석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때에 못해서
조금이나마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두 녀석에게서 해방이 되어
혼자 있으면 참 좋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혼자 있었다면
김형석 작가의 표현처럼
“한발로 서있는 것 같은 쓸쓸함”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첫째녀석과 함께한 오늘은
외롭지 않고 든든했다.
손잡고 다니는 내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사이 내 마음도 스르르 풀어졌다.
첫째녀석이 함께해준 덕분에
화로 그냥 지나쳐버릴 하루가
맘에 드는 하루로 바뀌었다.
★ 책 속의 글귀
행복이란
얼마큼 행복한 일들이 내게 일어날까, 라는
객관적인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큼 내가 그것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을까, 라는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로 결정된다는 것을.
이제는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
안일한 위로를 향한 도피가 아닌
엄청난 재능임을 안다.
그것은 사실 이것이 있어서 행복하다가 아니라,
이것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 임경선의 ‘자유로울 것’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