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사춘기 시절에 대해 누군가가 설명한 말이 생각난다. “하루 종일 야한 생각을 했어요. 쉴 틈이 없었죠. 중요한 일을 할 때도 야한 생각은 잠시 물러서서 저를 주시하다가 그 일이 끝나면 다시 앞으로 나서곤 했죠.”
개인차가 있겠지만, 사춘기 호르몬의 분비와 함께 점점 커지는 성적인 욕구를 꽤나 사실적으로 표현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사춘기 소년들의 뇌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정상이 아니야!” 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니 그러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춘기 소년에겐 그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그 소년들이 자라서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도 되고, 신을 섬기는 사제도 되고, 각종 나쁜 것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교사도 된다.
고교 시절을 지나면서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성적인 욕구는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욕구를 분출하고 싶어 으르렁 거리는 몬스터만 소년 안에 산다면, 이 사회는 사춘기 소년들이 일으키는 문제들로 골머리를 썩을 것이다. 실제로 일부 소년들은 그 자신이 잔인한 괴물이 되어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몬스터가 사춘기 호르몬을 받아먹고 소년 안에서 발육하는 동안, 반대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수한 낭만적 사랑에 대한 욕구도 함께 커져간다. 고교 시절쯤 되면, 소년 안에는 욕구를 분출하고 싶어 으르렁 거리는 몬스터와 상대를 순수한 사랑으로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로맨티스트가 공존하기에 이른다. 몬스터와 로맨티스트는 소년 안에서 다툴 때도 있지만, 보통은 로맨티스트가 몬스터를 어르고 달래서 그것이 몸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소년 속 몬스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 흘리며 보낸다.
소년 안에 있는 몬스터와 로맨티스트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말로 불린다. 심리학적 개념이나, 문학적인 수사들로 표현되기도 한다.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이 로맨티스트는 몬스터를 제어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고, 때로는 몬스터가 내뿜는 격정적인 감정을 이용하기도 한다. 로맨티스트는 소년이 이 세상의 무대에서 보이고 싶은 역할 그 자체다. 아주 도덕적이고 분별력 있으며, 시를 사랑하고 소년을 선한 인간으로 보이도록 하는데 일조한다.
사춘기 시절의 외부 환경은, 몬스터나 로맨티스트를 강화시키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몬스터의 근육을 강화시켰던 것들을 굳이 언급하진 않겠다. 아마 다들 짐작할 거라 생각하니까.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내 안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촌부에 불과했던 로맨티스트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든 얘기다. (흠, 몬스터의 이야기를 기대하셨다고요? 저 그런 거 잘 몰라요(-.-)ㅋ)
레터 투 로맨티스트
고1때 우리 반의 반장은, 아주 훌륭한 녀석이었다. 공부에, 운동에, 못하는 것이 없었고 성격도 괜찮아서 인기가 드높았다. 물론 외모도 호감 형이었다. (조각 같은 얼굴은 아니었으나, 좋은 조건에 최적화된 외모였다.) 그 중 가장 훌륭한 면은, 그가 가진 멋진 조건들 탓에 주변으로 모여드는 여학생들을 잘 관리했다는 점이다. 훌륭한 인간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크든 작든 영향을 끼친다. 반장의 여사친이 된 여학생 중 하나가 예술고교를 다녔고 미술반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는 우연은, 결국 내게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난 이런 얘기를 좋아한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 쌓이고 쌓여,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 말이다.
우리가 이제 막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시작한 4월의 어느 날 오전, 쉬는 시간에 그 훌륭한 반장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우리가 무질서해질 찰나에, 주의 집중을 시켰다.
“OO예술고등학교 다들 알지? 거기 미술반 애들이 우리랑 펜팅을 하고 싶어 해. 편지를 주고받는 거지. 그 애들이 준 편지들을 여기 가지고 왔어. 펜팅 하고 싶은 애들은 편지 하나씩 가지고 가서 읽어보고 모레까지 답장을 써서 줘. 내가 모아서 그 쪽에 전달할게.”
그 당시에도 모르는 상대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을 ‘펜팔’이라고 불렀다. 학급 대 학급이 단체 미팅의 개념으로 편지를 주고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우린 그걸 ‘펜팅’이라고 불렀다. ‘펜팔’은 왠지 올드한 느낌이다.
반장은 가져온 편지들을 쿨하게 앞쪽 책상에 쏟아 놓고는 유유히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아, 멋진 녀석! 아이들은 갑작스런 반장의 제안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반장이 앞쪽 책상에 쏟아 놓은 편지를 하나씩 집어 들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고 싶었던 아이들은 그 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작은 관문이었다.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그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기회, 간접적이지만 또래의 여자와 이야기해볼 기회. 사춘기 소년들에게 봉인되다시피 한 일들이 지금 일부 열릴 참이었다.
내 기억에, 두 명의 친구는 의지적으로 편지를 집어 들지 않았다. 호르몬을 거슬렀던 이 신비한 두 녀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녀석은 <사하라> 같은 베스트셀러를 쓴 클라이브 커슬러의 모험 소설에 푹 빠져 있던 친구였다. 그는 커다란 안경을 꼈고 우리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다. 그는 책 말고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책벌레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녀석은, 그 당시 떠오르던 배우 김지호와 클라이브 커슬러의 모험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더크 중에 후자를 선택할 녀석이었다. 고1때 반에서 두 번째로 키가 작았던 나는 그의 단골 짝이었다. 덕분에 나도 한동안 클라이브 커슬러의 모험 소설에 손을 대기도 했다.
다른 한 녀석은 컴퓨터에 푹 빠져 있던 친구였다. 온 얼굴에 여드름이 나 있던 그는, PC통신과 컴퓨터 게임을 하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 내가 고1때만 해도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집은 별로 없었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PC통신까지 즐길 정도면 상당히 앞서 가는 부류였다. 얼굴에 난 여드름의 개수만 보면 누구보다 사춘기 호르몬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지만, 여유 시간을 컴퓨터 세계 탐험에 쓰기에도 모자랐던 것 같다. 소녀에 가까운 성향도 그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여튼 반장이 가져온 편지는 매진되었다. 종이 치자마자 화장실에 다녀온 어떤 녀석은 뒤늦게 반장의 제안을 알게 되고는, 만만한 녀석에게 접근해서 편지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펜팅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 손을 뻗지 않은 두 명과 편지가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집어 들지 못한 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손에 여학생에게 온 손 편지 한 통씩을 가지게 되었다.
편지를 손에 든 어떤 녀석은 흥분과 기쁨을 전혀 다른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왜 미술반이냐고? 그 학교에 무용반도 있는데!” 그 말을 하면서도 그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꽤 덩치 큰 몬스터를 안에 가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 편지를 다른 이에게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음 에세이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