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이었다. 파주의 한 서점을 기웃거리던 중 제목에 이끌려 손에 들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제목을 써보나, 그 보석같은 문장에 시기와 부러움을 한없이 쏟아냈던 기억이다.
이 글은 2017년 1월에 작성했고 내 블로그에 포스팅까지했지만 거의 아무도 읽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쓴 수 많은 글들이 그렇게 잊혀져갔다. 아니, 냉정히 말하면 잊혀진 건 아니다.
기억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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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는 매우 특이한 소설이다. 모든 소설은 삼인칭 혹은 일인칭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야간 열차 안에서 주인공은 바로 우리가 된다. 이 소설은 이인칭, 즉 당신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날 오후부터 밤까지 당신은 함부르크 역 근처에 있는 작은 홀에서 춤을 추었다(p.9).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남의 사생활을(소설 읽기의 즐거움은 관음증에서 기인한다) 훔쳐보려던 당신은 느닷없이 함부르크의 댄스홀로 소환당한다. 관객이 아닌 이야기의 주체로서 이 여행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여행을 한다는 것, 즉 누추한 일상을 벗어던진채 마음에 낀 생활의 때를 벗기고자 하는 우리의 판타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야간 열차는 도처에 숨어 있는 암초를 만나 깨지고 뒤틀리고 멈춰 선다. 여행을 지배하는 건 설렘이 아니라 낯설음이다. 덜커덩 거리는 열차의 진동이 심장을 자극하고, 이 낯섦은 불안을 낳는다.
얼핏 이 여행은 실패한 인생에 대한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깨지고 뒤틀리고 좌절하는 우리의 인생. 지름길을 찾아 고군분투하지만 결국엔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그래 그런거.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가 인생에 대해 갖는 고정 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는다. 예컨대,
삶에 목적이 있다는 게 가당한 얘기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질문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다. 나는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 혹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눈을 감고 존재의 무게를 느껴보자. 그게 그렇게 가벼웠던가? 사르트르의 말을 기억하자. 존재가 있고 목적이 있는 거지 목적에 맞춰 존재가 탄생한 게 아니다. 그래서 깨지고 뒤틀리고 멈춰서는 이 여행을 실패한 여행, 혹은 망가진 인생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관점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계획이 엉성하거나 바보같거나 멍청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목적지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실패, 모든 좌절, 모든 성공, 모든 웃음, 모든 슬픔, 모든 눈물, 모든 환희는 그 자체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정해진 목표를 기준으로 유용, 무용 또는 완료, 미완료로 구분될 수 없다. 모든 사건은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고, 이 세계에 실패한 여행이란 없다.
그래서 열차의 지연, 잘못된 기차에 타는 것, 짐을 잃어버리는 것 등등은 인생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파리행 열차가 파업으로 브뤼셀 역까지 밖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의 여행은 미완료 된 게 아니다.
브뤼셀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용의자의 야간열차>에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가 열세 개나 묶여 있다. 흥미진진한 여행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대단한 미스테리나 스릴러를 암시하는 듯한 제목도 터무니 없는 기대였다는 게 금방 드러나지만, 소설은 마치 정해진 곳 없이 부유하는 유령 열차를 탄 것처럼 흡입력 있는 현장감을 전달한다. 다른건 몰라도 이 책의 저자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선 천재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렇게 지루한 얘기를 읽고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어느새 야간 열차의 침실칸에 누워 소설이 뿜어대는 불안과 신비를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