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늘어간다는 것 vol.1
문학적 글쓰기 9th
객관성을 획득하는 과정
아이가 그림을 그린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엄마와 아빠에게 보여준다.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와, 멋지구나. 우리 딸 그림 정말 잘 그리네!”
칭찬을 받은 딸은 엄마 아빠를 따라 함께 웃는다. 이 칭찬 뒤에 꼭 따라 붙는 말이 있다.
“근데 이거 뭘 그린 거야?”
그러면 아이는 거대하게 이어진 색연필의 자취를 짚어 가며, “응 이건 태양이고, 음, 이건 트리케라톱스야.” 라고 말한다.
아이는 그림을 그릴 때, 분명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특정했다. 무엇 하나 허투루 그린 게 없다. 태양이라 지칭한 부분과 트리케라톱스라 설명한 부분이 하나의 거대한 대륙 같아 보여도 그 그림 안에는 아이가 그릴 때 생각한 대상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아이가 특별하기를 바라는 아빠의 입장에서, ‘트리케라톱스를 태양의 일부라고 생각한 걸까’, 하는 합리화의 카드를 잠시 꺼내들었다가, 이내 억지 해석은 경계하자고 다짐한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딸이 그린 그림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색연필이 종이 위를 자유로운 춤을 추며 걸어 다닌 것 같이 난해한 흔적들을 내 입장에서 해독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네 살이 된 딸의 요즘 그림은, 70% 이상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형태가 잡혔다. 수염 달린 할아버지를 그린 것도 알겠고, 웃고 있는 아기를 그린 것도 알겠다. 그림이 점점 객관적인 시각으로 판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의 그림은 아직 다분히 주관적인 형태를 띠지만, 객관성을 획득해 나가고 있다.
아이가 웃고 있는 애벌레를 그렸지만, 내가 그걸 보고 아 이건 영락없이 속싸개에 싸인 아가로구나, 하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건 아직 아이 그림의 주관성과 내 판단의 근거가 되는 객관성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주관성과 그 그림에 깃든 객관성은 점점 균형을 이룰 것이고, 아이가 자신의 주관대로 그려도 다른 사람이 볼 때 뭘 그린 건지 해독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을 시간은 올 것이다.
다들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아이의 그림이 객관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우리의 글쓰기 실력이 자라는 과정과 비슷하다.
우린 때때로 글 깨나 쓴다는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며, 전문적인 용어가 대거 등장하는 것도 아닌데 한 80%정도 밖에 이해가 안 되는 경험을 한다. 그 이해되지 않는 20%는 글을 풀고, 문장을 선택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똑같은 주제, 똑같은 소재를 다루어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떤 지향을 갖고 쓰느냐에 따라 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이해도가 달라진다. (애초에 ‘불친절함’을 지향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 해도, 독자의 해독에 ‘무신경한’ 경우는 적지 않은 것 같다. 결국 이 ‘무신경함’을 ‘불친절함’으로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묘사’하는 것이다. 묘사에는 내가 본 것, 체험한 것을 그려내는 외부 묘사가 있고, 내면의 생각이나 흐름을 그려내는 내면 묘사가 있다. 내 생각엔, 글이 는다는 것은, 내 주관적인 묘사가 얼마나 객관성을 획득하는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어린 아이의 그림처럼 말이다.
글을 좀 쓴다고 우쭐거리던 예전에, 나의 내면을 글로 표현한답시고 화려한 단어와 복잡한 문장 구조로 글을 써대곤 했다. 그런 글을 읽은 많은 이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와, 너 글 잘 쓴다!” 사실 그런 글은 나에게 조차도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묘사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릿속의 꼬이고 뭉친 실을 살살 풀어서 꺼내놔야 하는데, 뭉친 채로 꺼내면서 화려한 색만 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칭찬은 듣기 좋았지만,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글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내게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글을 잘 쓴 것처럼 보였지만, 확실히 좋은 글을 쓰진 못했다.
나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문체로 글을 쓰던 예전보다 지금 내 글이 훨씬 ‘늘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이 글을 해독하는데 필요한 객관성을 획득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하나의 대륙처럼 섞이고 뭉쳐 있는 그림들을 화려하게 꾸며 내놓기보다, 살살 분리해내어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다른 사람이 읽기 쉬운 말로만 쓰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런 글은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의 주관성, 나의 미학적 지향이 글에 담겨 있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을 쓴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내 안에 모호하게 일어서는 생각들을,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로 묘사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계속 글을 쓰면서 성장해야 할 지점이다. 화려한 문장은, 와 잘 쓰는구나, 하는 순간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모호한 생각을 풀어 잘 정리된 형태로 묘사해내었을 때 읽는 이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독자들은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이거였어. 이게 바로 내 속에 떠돌던 생각이야. 이걸 이렇게 표현내다니!” 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내가 줄곧 생각은 했지만 감히 꺼내놓지 못했던 걸, 실 하나 하나를 풀어 꺼내놓은 글을 읽고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머릿속의 실 뭉치 풀어내기
그럼 어떻게 머릿속의 실타래를 풀어낼 것인가. 실 뭉치를 풀어내는 일은, 삼분의 일은 글을 구상할 때, 삼분의 일은 글을 쓸 때, 나머지 삼분의 일은 글을 고칠 때 이루어진다.
글을 구상할 때,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은 감정,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을 표현할 때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최대한 꺼내지 않고 숙성시키는 것도 좋다. 때론 이해되지 않던 내 안의 생각과 감정들이 글을 쓰면서 한꺼번에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 전에 생각을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치면 글을 쓸 때 더 매끄럽게 생각들이 뽑혀 나온다. 고통스럽고 깊이 생각할수록 독자들은 쉽게 읽는다.
글을 쓸 때도 그 생각을 독자들이 더 쉽게 해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치는 ‘비유’이다. ‘이야기’는 그 어떤 논리보다 설득력이 있다. 적절한 비유는 거친 밥을 부드러운 이유식으로 만들어준다. 내가 이 글의 초반에 아이의 그림 이야기를 넣은 것도 실 뭉치를 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또 하나의 장치는 문장을 조금 더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문 지상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문장을 단순하게 쓰려는 노력은 복잡한 생각을 단순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작법서의 제1계명처럼 되어버린, “단문을 쓰라!” 고 말하는 건 다음과 같은 비유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운전을 배우려는 한 사람이 있다. 자동차엔 자동 기어와 수동 기어가 있는데, 운전을 어려워하는 초짜에게 우린 대부분 자동 기어를 권한다. 일정한 실력 이상이 아니라면, 수동 기어의 차를 자동 기어의 차보다 잘 몰기란 어렵다. 하지만 운전 감각이 뛰어나고 운전에 숙달이 된 사람은 수동 기어로 더 훌륭한 드라이빙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문으로 쓰라는 조언은 자동 기어로 운전을 하라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뛰어난 경지에 오르지 않아도 일정 수준의 가성비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운전을 배우려는 대부분의 이들이 자동 기어를 선택하고, 글쓰기를 배우려는 많은 이들이 단문으로 글을 쓰라는 조언을 받아들인다. (다른 의미로 단문만이 훌륭한 글을 보장한다는 건 틀린 말이 될 수 있다.)
끝으로, 머릿속 실 뭉치는 글을 고치는 과정을 통해 마무리된다. 내가 쓴 초고를 독자가 되어 찬찬히 읽어보라. 독자의 입장에서 탁탁 걸리는 부분이 있거나,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다시 쓰거나 덜어내야 할 부분이다. 간혹 내가 쓰고 나서 아주 만족스러웠던 문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아주 곤혹스럽다. 그 문장을 보존하고 싶은 욕망과 망치와 정을 대야 하는 당위가 갈등을 빚는다. 정답은 늘 후자다. 하지만 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 문장을 살려두는 경우도 있다. 실이 뭉쳐진 채 화려하게 채색된 문장이 떡 하니 버티고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을 억제하고 망치와 정을 가차 없이 들이댈 수 있을 때, 점점 더 좋은 글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나의 글쓰기가 늘었다는 걸 판단할 수 있는 지표 하나를 풀어보았다. 다음 편에서 또 하나의 기준을 살펴보겠다.
P.S.
글쓰기가 좀 늘었다고 자평하지만, 머릿속의 실 뭉치를 풀어내는 일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제 기준에서 성공적인 글을 쓰고 나면 아, 이러려고 그동안 글을 써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듭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글을 쓰고 나서는 잠시 잠깐 방황의 과정을 겪습니다. 뭐가 잘못된 거지? 하며 어디에선가 막혀 있는 것 같은 그 지점을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그동안 그렇게 글을 쓰고도 이 모양이구나, 하는 자학마저 합니다.
저의 글쓰기는 늘 이렇게 온탕과 냉탕을 오갑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다보면 목욕의 목적, 즉 몸이 깨끗해지는 결과를 얻듯, 글쓰기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성장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 중에 제일은, 글을 쓰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내 글쓰기가 자라고 있다는 ‘믿음’이며, 그 끝은 언젠가 내가 괜찮은 작가가 되어 있을 거라는 ‘소망’입니다. 글쓰기에서도 믿음, 소망, 사랑은 버팀목이 되어 줍니다.
[문학적 글쓰기] 연재목록
(여덟 번째) 문장에 대하여 vol.2
(일곱 번째) 문장에 대하여 vol.1
(번외편) 당신은 글쟁이입니까
(여섯 번째) 의식의 흐름을 이용한 문장 연습과 시 쓰기
(다섯 번째) 글쓰기 프로세서- 입력에서 출력까지의 과정
(번외편) 극한 글쓰기
(네 번째) 글쓰기의 소재 찾기
(번외편) 글쓰기의 절대 고수
(세 번째) 글쓰기 필터와 논리적 구성에 대하여
(두 번째) 글쓰기와 구체성
(첫 번째) 글쓰기와 문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