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고등학생들이 줄지어 걷고 있다. 밤새 걷는 여정 속에서 그들은 이 친구, 저 친구와 대화도 하고 생각도 한다. 평소 소원했던 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좋아했던 친구에 대한 마음도 터놓는다. 무얼 한다는 목적은 없다. 그저 정해진 곳까지 함께 걸을 뿐이다.
‘야간보행제’는 밤을 새워 80km를 걷는 행사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 열리는 고3의 큰 행사다. 소녀는 이 밤에 묵은 숙제 같은 일을 해결했으면 한다.
동갑인 이복 남매가 같은 반이라는 사실은 불편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평소 소녀는 이복형제인 소년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소년은 자기 아버지의 외도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쓰린 상처의 결과물과 같은 소녀는 매일 만난다. 소년은 소녀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소년은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없다.
졸업을 하면 소년과 소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복 남매라는, 끈인지 경계석인지 모를 인연 때문에 서로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그 인연마저도 졸업 이후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들은 각자 먼 곳으로 떠나 어른이 되고, 거기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룰 것이다. 다시 볼 일은 없어질 것이다.
걸으면서 소녀는 친구들을 통해 소년에 대해 더 알아가게 된다. 소녀와 소년은 졸업 전에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일본 작가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의 내용이다. 고3의 마지막 야간보행제 행사를 배경으로 하룻밤 동안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친구들의 대화 속엔 빛나는 부분들이 있다.
뺄셈의 부드러움
이복 남매인 주인공들의 관계를 모르는 친구가 소년과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소년과 소녀가 닮은 점을 소녀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흐음, 그래서구나. 인상이 비슷한 데가 있는 것은.”
“인상, 비슷해?”
“응, 야무지고 어른스러운 점.”
“나, 전혀 야무지지 않아.”
“아냐. 타인에 대한 부드러움이 어른의 부드러움인걸. 뺄셈의 부드러움이랄까.”
다카코는 또 웃음을 떠트렸다.
“뭔가 도다, 대단하지 않아? 리카보다 각본가 쪽에 어울릴지도 모르겠는걸.”
“오호, 내 자신도 모르는 재능을 발견했군……. 대체로 우리 같은 어린아이들의 부드러움이란 건 플러스 부드러움이잖아. 뭔가 해준다거나 문자 그대로 뭔가 준다거나. 그러나 너희들 경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주는 부드러움이야. 그런 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그런가.”
뺄셈의 부드러움은, ‘뭔가 해주는’ 플러스의 부드러움과 대비되는 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부드러움.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누군가를 담담히 지켜봐주고 신뢰해주는 자세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뺄셈의 부드러움은 어른의 부드러움이다.
뺄셈과 플러스의 부드러움을 굳이 진부한 비유로 그 차이를 설명하자면, 울고 싶은 사람이 비를 맞고 있을 때, 플러스의 부드러움은 우산을 갖다 주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하는 것이고, 뺄셈의 부드러움은 다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서 비를 맞고 함께 기다려주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뺄셈과 플러스는 호응이 어색해보이지만, 굳이 플러스를 덧셈으로 바꾸지 않고, 소설에서 언급한대로 쓰도록 하겠다.
예전 이 소설을 읽었던 20대에 이 대목이 더 빛나 보였던 것은, 누군가에 대한 애정과 마음을 표현하던 모습이 온통 ‘플러스의 부드러움’으로 가득 찼던 시기였고, 언젠가는 어른의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일어서였을 것이다. 아직 미숙했던 그 때에도 뺄셈의 부드러움이 더 중요한 덕목이 되리라는 예감을 가졌던 것 같다.
또 이 말은, 뭐든 더하고 더 가지는 것을 ‘가치’로 여기는 현 시대에 ‘빼는’ 것,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상위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더 멋지게 다가온다.
뺄셈의 부드러움은, 인격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 ‘뺄셈의 부드러움’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게 뭘 해주고, 뭘 안겨주면서 격려하는 일은 기분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다.
상을 받은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일
프로젝트의 성과를 낸 직원과 부서에게 회식비를 건네며 격려하는 일
골치 아픈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 부하 직원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찬의 말을 건네는 일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친구에게 박수를 치며 축하하는 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다발을 건네거나 깜짝 선물을 주는 일
이런 일들이 플러스의 부드러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상황들에서 이렇게 반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표현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사람에겐 이런 것도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지만, 소설의 표현대로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부드러움의 표현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부드럽기란 쉽지 않다.
시험을 망친 아이를 비난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는 일
오랫동안 준비해온 프로젝트를 실패한 직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
직원의 실수나 잘못을 함께 책임지며 직원 앞에선 침묵하며 일을 수습하는 것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동료나 부하 직원을 바라보며 뒤에서 조용히 배려하는 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뭔가를 해야 할 때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어울리는 것
어떤 일을 맡은 사람이 못 미더워도 호통 치지 않고 잠잠히 기다려주는 것
이런 일들이 어려운 것은, 이건 기분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러스의 부드러움’이 어떤 상황에서 사람이 표현하고 싶은 본능에 가까운 일이라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별다른 액션 없이 부드러움을 보이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인격의 성숙이 필요한 일이며 평소 사람을 보고 대하는 태도와 관계된 덕목이다. 그래서 더 어렵다.
여러 학교를 거치면서, 많은 어른들을 만나지만 진짜 ‘어른다운 어른’이라고 꼽을 만 한 분은, 바로 이 ‘뺄셈의 부드러움’을 가진 분들이었다. 이 차이는 몸으로 금방 감지할 수 있다. 어떤 분이 내 등 뒤에서 내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시에 찔린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때론 너그러운 눈빛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누구라도 그 느낌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뺄셈의 부드러움이, 나이 들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나이가 어려도 친구를 대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이런 부드러움의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을 만날 때,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어른스럽다’고 평가한다.
‘어른’이라는 것은, 나이를 먹으면 얻을 수 있는 자연발생적인 칭호다. 하지만, ‘어른스럽다’는 것은 나이와 관계없이 그 사람이 어른의 덕목을 가졌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나이를 먹고 높은 지위에 있어도 어른답지 않을 수 있고, 아주 어리고 낮은 지위에 있어도 어른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한 발짝 뒤에서 미숙한 나를 기다려주고, 널 믿는다는 눈빛을 보내주며, 나의 실수로 나 스스로가 더 나를 질책하고 있을 때, 아무 말 없이 괜찮다는 미소를 보내주는 어른이 그립다. 어쩌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그런 어른을 그리워할 수도. 이 글의 첫 수신자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점점 진짜 어른이 부재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뺄셈’이 더욱 간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