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란.
사람마다 말투가 다르듯, 저마다의 글투를 가지고 있다.
글투, 즉 문장의 느낌, 개성적인 스타일을 문체라고 한다.
문체는 사용하는 어휘의 느낌과 문장의 길이, 문장의 성분 등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그의 공손하고 부드러운 말투에 매료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만의 독특한 말투에서 풍기는 격조와 우아함에 빠져드는 경험 말이다. 때로는 누군가의 투박하고 순박한 말투를 듣고 한없이 편안한 마음이 든 적도 있을 것이다. 말투에서 느끼는 것을 우린 문체에서도 느낄 수 있다.
글의 내용을 떠나 문체 그 자체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소설가나 작가들은 자신 만의 문체를 갖기 위해 오랜 기간 문장 훈련을 한다.
물론 문장을 구사할 때는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표현 없이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매력을 끌기 위해서는 수련을 통해 자신 만의 매력적인 문체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문체를 확립하려면.
그렇다면, 어떻게 문체를 확립할 것인가.
패션의 문외한이던 고등학생이 졸업을 하고 대학에 가서 스스로를 꾸며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뭘까. 바로 패셔니스타를 보고 따라 하는 것이다. 옷 좀 잘 입는다는 주변 사람들부터 저 멀리 연예인까지, 참고할 수 있는 건 다 따라 해 본다. 많은 스타일을 접하면서 내가 어떤 스타일에 끌리는지, 어떤 스타일이 어울리는지를 알게 되면 그 스타일이 점차 자신의 패션이 된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자신만의 아이템을 더하고 빼면서 마침내 자신만의 패션을 완성하게 된다.
물론 아무 옷이나 입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다. 하지만 내 몸을 가리고 체온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기능을 넘어서서, 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다거나, 개성을 표현하고 싶다면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나만의 문체를 확립하는 과정도 패션이 자리 잡아 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좋은 글과 문장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가까운 블로거의 글부터 대문호의 글까지 많이 접한다. 이 글의 스타일이 참 맘에 든다거나,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모방의 단계다. 이를 위해서 소설가 지망생이 많이 하는 게 바로 ‘필사’다. 좋은 작가의 글을 베껴 적는 것이다. 그 유명한 신경숙 작가가 소설가를 꿈꾸었을 때부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글쓰기 연습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글을 베껴 적다 보면 그 문체가 익고, 문체가 익으면 한동안 그 작가의 문체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뿐더러, 여기서 머무르면 ‘자신’만의 스타일이 형성되지 않는다.
모방 단계를 지나서 자신 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려면 많이 쓰는 수밖에 없다. 중국 송나라 때 시인이자 문학자였던 구양수는 글쓰기의 기본으로, 다독·다상량·다작을 꼽았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는 말이다. 문체 형성의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개성 있는 문체 따라잡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개성적인 문체를 가진 소설가를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김훈 작가를 지목할 것이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의 작품에서 보여준 문체는 그 자체로 가히 예술이라 할 만하다. 예전에 김훈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글을 쓴 적이 있다. 김훈이 자주 쓰는 단어, 문장을 맺을 때 주로 쓰는 어휘, 대구를 이룬 문장, 의도적인 어휘 반복 및 변주 등 김훈이 쓰는 문장의 특징을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토대로 글을 쓴 것이다.
주제는 ‘삼겹살이 일으킨 전쟁’이다. 내용은 어이없지만, 문체만큼은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의 스타일을 따라 하려고 애썼다. (애쓴 정도지, 김훈 작가의 문장과의 직접적인 비교는.. 쩝.)
삼겹 전란
고기는 열을 받으며 가을 들판의 벼가 그러하듯 황토 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삼겹살의 표면으로 기름을 몰아내며 피어오른 연기는
콧속으로 꾸역꾸역 들어와 후신경을 자극했다.
신경에 닥칠 전란의 전조였다.
초장에 이리저리 몸을 뒤채인 파채가 빨간빛과 초록의 대비를 시각에 급박하게 타전하였다.
깻잎과 상추가 물기를 몸에 바르고 임무 수행을 위해 매복하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다.
모든 것이 합하여지고 오랜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시점이었다.
고기는 결의를 다지며 몸에 쌈장을 찍어 발랐다.
맵고 몸이 따끔거렸다. 그럴수록 더욱 전의에 불탔다.
깻잎과 상추가 몸을 구기며 고기와 파채를 감싸 안았다.
고기와 파채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려는 듯이 온몸으로 감싸며
하나로 어우러질 순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씹히고 찢어지고 으스러지면서 하나가 되어갔다.
앞니와 어금니의 거친 방어선은 힘없이 무너져갔다.
삼겹살의 맛은 입속에서 강한 폭발력을 자랑했다.
혀끝의 미뢰가 전율했다.
고기와 야채, 그리고 양념의 돌진에 속수무책이었다.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말초신경으로 미각이 정복당했음을 타전했다.
한번 정복당한 미각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너져갔다.
입은 쉼 없이 삼겹살을 받아들였고,
미신경을 통해 타전된 패전의 소식은 말초신경에 도달해 벌써 척수를 지나 뇌를 거쳤다.
뇌는 삼겹살을 대항할만한 어떠한 명령도 내릴 수 없었다.
맛은 끈질기고 깊었다.
뇌는 이미 미뢰의 통곡을 듣고 있었다.
척수에 가득한 삼겹살의 향에 뇌는 섬뜩했다.
뇌는 별 수 없이 아드레날린을 분비했다.
대항할 수 없다면 화친해야만 했다.
몸이 극소 불행의 선을 넘지 않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첫 번째로 달려들었던 삼겹살은 식도를 거쳐 위장에 도달할 때 승전보를 들을 수 있었다.
뇌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로 결정하여, 삼겹살의 난입을 환영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형체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새로운 정복지에서 그의 영양소는 분해되어 구석구석 스며들 것이었다.
결코 축소될 수 없는 삼겹살 제국의 꿈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삼겹살 부대는 오늘도 미각을 정복하고, 뇌에 흥분의 깃발을 꽂았다.
제 몸이 으깨어 사라지면서도 진격을 멈추지 않은 삼겹살은,
죽음이 삶과 다르지 않음을 떠올렸다.
어떤가. 김훈이 표현하던 전쟁의 급박함이 느껴지는가.
문체의 특징만 파악한다면 문체도 흉내 내기가 가능하다.
김훈 작가의 글처럼 개성 지수가 높고, 도드라지는 문체일수록 더 따라 하기 쉽다.
어떤 예술도 그러하지만, 자신의 문체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첫걸음은 많이 보고, 모방해 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그럼 모방에서 멈춘다면, 내 개성은 영영 사라지는 거 아니야? 하는 우려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방은 계속 의식하고 일부러 의도하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따라 하긴 힘들다. 사고는 자신의 모국어를 매개로 일어난다. 기본적으로 자신 만의 언어 체계, 문장 특성을 바탕으로 사고 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의식하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글을 쓰면 사고에 활용되던 글투가 나오기 마련이다.
정보를 전달하거나 주장을 담은 글에서는 쉽고 단순한 문장이 적합하다. 이런 글에서 화려한 문체는 군더더기로 인식될 우려가 있다.
(이런 종류의 글쓰기에 관해서는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같은 책이 도움이 된다.)
나 역시 정보를 전달하는 글과 칼럼을 쓸 때는 간결하고 남용 없는 문장으로 쓰려하고, 문학적인 글인 에세이, 소설에서는 풍부한 울림을 만들어 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문학적인 글쓰기를 동경하는 사람은 문체의 수련을 통해 문장미를 만들어내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 좋다. 훈련으로 길러지는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 지속성에 따라 그 성과는 다르게, 또한 정직하게 나타난다.
덧붙여, ‘한국 문학의 축복!’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김훈의 <칼의 노래> 몇 대목을 싣는다.
첫 문장은 한국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 중 하나로 칭송받고 있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해도 이 문장들을 보면,
‘문장의 아름다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성난 파도와도 같은 한없는 적의가 어떻게 적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작동되는 것인지, 나는 늘 알지 못했다.
적들은 오직 죽기 위하여 밀어닥치는 듯했다. 임진년에 나는 농사를 짓듯이,
고기를 잡듯이, 적을 죽였다. 적들은 밀물 때면 들이닥치는 파도와도 같았다.
임진년의 싸움은 힘겨웠고 정유년의 싸움은 다급했다.
모든 싸움에 대한 기억은 늘 막연하고 몽롱했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임금은 나를 죽여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고
나를 살려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 적이었다.
적선이 깨어질 때마다, 벌통이 깨어진 것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병들이 물위로 쏟아져 내렸다.
갑판 밑에서 노를 잡던 격군들이 물 위로 쏟아져 내릴 때,
조선말로 비명을 질렀다. 격군들은 대부분 조선 백성들이었다.
머릿속으로 구들의 숫자를 헤아리다가, 그만두었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북은… 계속… 울려라… 관음포는… 멀었느냐?”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