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에세이, '탈출 전문가'에서 일부 내용은 이어집니다.
연습장을 야간 자율 학습의 탈출 도구로 사용할 때는 단 한 번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금서(禁書)에 손대기 시작했을 때, 위험 수위가 급격히 높아졌다. ‘금서’의 기준은 이랬다.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단편소설 100선>이나 <수능에 출제되는 소설 100선> 류의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 모두!
아주 가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단편 소설인데, ‘교과서’나 ‘수능’이 붙은 제목의 책이 아닌, ‘누구누구의 소설집’ 같은 제목의 책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금서’ 취급을 받은 경우다. 그 소설을 읽고 있던 친구는 제대로 항변도 하지 못하고, 귀를 잡혔다. 당일의 야자 지도 선생님이 국어가 아닌 수학 선생님이었던 것이 그 친구에겐 불행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들은 냉철한 알파고처럼 야자 시간 중의 독서를 통제하셨다.
내가 빠져든 책은, ‘금서’중의 금서였다. 귀가 아니라, 머리채를 잡혀도 할 말 없는 책이었다. 바로 무협지의 아버지, <영웅문> 시리즈였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홍콩의 무협 작가 김용이 쓴 세 권의 책이 고2때 우리 독서계를 강타했다. 원제는 각각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출판사 ‘고려원’에서 영웅문 1~3권으로 나왔다. 무협 장르를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을 때, 단 하나를 읽어야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이 영웅문 시리즈를 선택하면 된다.
고려원에서 출판된 영웅문 시리즈. 이후 김영사에서'사조삼부곡 시리즈'로 원제를 달고 재출간되었다.
이 책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도 제목들은 낯익을 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에 이 책들은 영화와 드라마로 수없이 제작되어 나왔다. 이 책들은 무협 이야기 세계에서 매우 큰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무협 컨텐츠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책의 어마어마한 위상도 야자 시간엔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영웅문 시리즈가 그 시절 나와 내 친구들의 일상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끼쳤는지 잠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한 8명쯤 되는 내 친구들 무리는 점심을 먹고 나면, 바깥으로 산책을 나가서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큰 바위가 있는 작은 학교 숲으로 들어가곤 했다. 거기서 우리가 한동안 했던 놀이가 바로 영웅문 역할 놀이였다. 그 책들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저마다 개성과 매력이 그렇게 뚜렷할 수가 없었다.
의협심 넘치고 꾸밈이 없어 주어진 상황을 매번 묵직하게 돌파하는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 약삭빠른 면도 있고 조금은 어두운 정서를 갖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지고지순한 <신조협려>의 주인공 양과, 어리숙하고 선한 마음씨를 지녔지만 결단력이 없고 우유부단한 <의천도룡기>의 주인공 장무기. 거기다가 주인공들과 인연을 맺는 중원의 최고수 다섯 사람.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의 천하 고수, 중신통 왕중양,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황야, 북개 홍칠공. 이들은 지금으로 치자면, 개성이 뚜렷한 어벤저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캐릭터의 스핀 오프 시리즈도 쏟아져 나왔다.
1994년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은, 영웅문의 등장인물인 서독 구양봉과 동사 황약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동사서독' 서독은 장국영, 동사는 양가휘가 맡았다. 2013년에 재개봉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도 장국영의 아우라는 대단하다.
이연걸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던, 영웅문 시리즈의 3부, '의천도룡기' 원작이 워낙 방대한 이야기라 영화로 담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여러 버전으로 드라마화 된 '신조협려'. 신조협려의 여주인공 소용녀 역할을 맡은 여배우들의 싱크로율 투표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역대 소용녀 역할을 맡은 10여명의 배우가 후보로 등장하는데, 그 중 최고의 소용녀로 인정받는 유역비
영웅문을 보았던 나와 친구들은 이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그 캐릭터의 어법으로 무공 대결을 펼쳤다.
“나의 일양지를 받아라. 세 번의 초식 안에 너를 제압하겠다!”
“그렇게는 안 될 걸. 내게 섣불리 대적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이가 한 둘이 아니다.”
“넌 내가 이미 구음진경을 연마한 걸 모르고 있구나!”
“너희 둘 모두, 나의 쌍수호박권으로 한꺼번에 상대해주겠다.”
<영웅문>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들어와서 우정을 확인하는 요긴한 놀이가 되었다.
한동안 내 저녁도, 이 책이 접수했다.(1~3부 각6권으로 총18권의 방대한 분량이었으니 꽤 오랜 기간의 야자 시간에 이 책과 함께 했을 것이다.) 나는 완벽히 엄폐한 상태로 무림의 고수들을 만났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교실 밖 발코니 사이를 넘어 다니며 우리의 야자 시간을 지도하셨다. 창밖으로 뭔가가 휙, 하고 지나간 느낌이 들면, 그건 어김없이 지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경공술을 펼치는 무림 고수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셨다.
문제의 그 날도 나는 중원으로 탈출하여 무림의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대각선 앞쪽에 앉아 있던 두 녀석의 목소리가 일시적으로 높아졌다. 아주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말다툼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경공술을 펼치던 선생님은 우리 교실 밖의 발코니에 안착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발코니로 통하는 교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셨다. 말다툼 하던 두 녀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셨다. 아주 잠시 동안의 소란이라, ‘주의’ 정도로 끝날 것 같았다. 선생님은 두 녀석을 번갈아 쳐다보며 매서운 눈빛으로 경고하셨다. 그 녀석들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선생님이 교실 뒷문을 통해 복도로 나가시려 했던지,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그때까지 난 소설 <영웅문>을 당당히 펴놓고 있었다. 선생님이 들어왔을 때 긴장해서 급히 책을 숨기려고 하는 애들은 100퍼센트 의심을 받고 걸리곤 했다. 난 선생님의 동선이 내 쪽인지 예상치 못했기에 책을 숨기려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었다. 선생님이 내 쪽으로 돌아서셨고, 선생님의 시선은 정확하게 내 앞의 책으로 꽂혔다. 선생님이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서셨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책을 집어 들어 표지를 읽었다.
“이 노무 자슥!”
그는 책을 내 책상에 떨어뜨리고는 바로 내 귀를 잡았다.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순간, 소싯적에 무림에서 무술을 연마하신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복도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금서를 읽은 죄로 곤장 형에 처해졌다. 선생님이 든 둥근 지도봉으로 엉덩이 다섯 대를 맞고 차가운 복도에 꿇어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에 석방되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자의 시공간 밖으로의 ‘탈출’이 적발된 날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난 ‘탈출’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자, 수시로 ‘탈출’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고교 시절, 야자 시간에 감행했던 탈출이 얼마나 안전하고 수월했던 거였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땐 탈출의 비용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 내가 할 일을 내팽개치고 탈출한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발생한다.
탈출 욕구가 가장 컸던 사람은, 교실 밖 발코니를 넘으며 경공술을 펼치시던 선생님들이 아니었을까. 금서도, 워크맨도, 연습장도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들은 오로지 모든 시간을 정직하게 견뎌내고서야 비로소 일상의 의무와 책임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자율학습에 붙들린 고등학생이나 직장에 붙들려 있었던 선생님들이나 모두 '야자'라는 거역할 수 없는 배를 타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선생님들이나 우리들이나 서로를 탈출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 밤을 함께 보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