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몰고 가다가 도로에 진입하려고 깜빡이를 켜고 서 있는 차를 만나곤 한다. 속도를 늦춰 진입을 도울 때도 있고, 그냥 지나칠 때도 있다. 지나치는 건 양보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기껏 올려놓은 내 속도를 줄이지 않기 위해서다.
일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야 할 일들을 뚫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삶의 속도, 습관의 관성을 높여야 한다. 그저 남는 시간에 하면 되겠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절로 되는 게 아니다.
일정한 속도가 붙은 습관만이 분주한 일상에 널린 일거리들 사이에서 제 기능을 발휘한다. 내겐 독서와 글쓰기가 그러하다.
일정한 속도로 삶의 궤도에 올라선 습관 앞에 깜빡이를 켜고 양보를 요청하는 일들이 생겨난다. 때론 사람이, 때론 일거리가 끼어들려고 저 앞에서 신호를 준다.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기 위해 양보를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지나가기도 한다.
독서나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것이 아닌 이상, 러시아워처럼 빡빡한 시간의 도로 위에서 '나만의' 시간을 누리는 건 녹록치 않은 일이다. 기껏 올려놓았던 습관의 속도는 사소한 일로 떨어지곤 한다. 어제 밤처럼 아이를 재우다가 함께 잠들면 밤에 계획했던 일이 무위로 돌아가고, 습관의 관성은 또 한 단계만큼 속도를 잃는다.
습관은 너무도 쉽게 속도를 잃어버린다. 눈에 보이는 계기판이 없다는 게 다행이다.
생활인으로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습관의 속도를 올리고 잃는 걸 반복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많은 작가들은 작가임과 동시에 생활인으로 존재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면서, 글쓰기의 감도 잃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이었다. 앤 타일러라는 작가는 이런 멋진 표현으로 글쓰기와 일상생활의 공존을 표현했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글 쓰는 자아 주위에 벽을 둘러치고 살았다. 그러면서 일상생활이 끼어들면 그 벽의 문을 닫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일상생활의 문을 닫는 법을 터득했다. 나의 두 자아가 다시 합쳐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가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 일상생활 속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느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본질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탁월성은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습관이다.” 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작가란 글을 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한 어느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돌이켜보면, 저물어가는 올 한해도 러시아워 같은 일상에서 시도했던 일의 결과물들이 꽤 쌓였다. 속도가 떨어졌다고 주저앉았으면 못했을 일들이다. 앞으로도 일상의 러시아워 속으로 습관의 차를 타고 나가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악셀과 브레이크를 수시로 밟으며 만족과 실망을 반복하며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어차피 생활인에게 고속도로는 풋잠 속 꿈에 불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