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아직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7시. 평소와 같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어두운 이유는 비가 오기 때문이다. 2주간의 지방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지사에 출근해서 몇 가지 형식적인 일만 마무리 지으면 점심을 먹기 전에 회사를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지사의 기숙사에 딸린 작은 게스트하우스가 2주 동안 내 임시 거처였다. 호텔의 객실을 그대로 재연해놓았지만, 매일 이불을 갈아주는 이도 없고 수건도 주지 않는다. 그래도 50인치 최신형 TV 하나는 여느 호텔 부럽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면 TV뉴스를 틀어놓고 머리를 감는다. 방을 오가며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귀로 뉴스를 듣는다. 오늘은 로션을 바르다말고 TV뉴스에 시선을 돌린다. 낯익은 얼굴이 TV에 나왔기 때문이다. 갑질 논란으로 검찰청에 들어서던 대기업 총수의 딸은 비슷한 일로 뉴스에 나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몰려들어 질문하는 취재진들에 한마디 한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죠. 제가 겪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최근 며칠을 떠들썩하게 한 주인공이지만, 얼굴엔 아무런 죄책감이나 후회가 없다.
난 로션을 얼굴에 마저 바르고 TV를 끈다.
4월의 비가 오는 날이면 오늘처럼 비 내리던 8년 전 어느 날이 떠오른다. 봄 가뭄을 걱정하던 때에 단비가 내렸다. 도시에 뿌리박은 나무는 한층 더 선명한 연둣빛을 발하고 있었다. 빗물이 모여들어 도로 곳곳에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굵은 빗줄기에 사람들은 커다란 우산에 매달려 무언가에 끌려 다니듯 오갔다.
좀 늦은 출근길이었다. 평소보다 방이 어두컴컴해서 늦게 일어난 탓도 있고, 비가 와서인지 아파트 입구로 몰려든 차량이 많아 밖으로 나오는데 오래 걸린 탓도 있었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지각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심호흡을 했다. 그럴수록 즐거운 기분을 유지해야 하는 거야, 라고 속으로 되뇌며 오디오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김동률이 내뱉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묵직하게 내려앉는 목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를 닮았다. 김동률의 목소리와 멜로디의 선율이 마음에 비처럼 내려 곳곳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마음에 생긴 웅덩이의 물이 출렁였다.
쭉 뻗은 6차선 도로에 접어들었다. 저 앞으로 보이는 신호등에 노란불이 켜졌다. 1,2차선 차들이 속도를 줄였다. 난 우회선을 해야 하므로 도로 가장자리로 차선을 변경했다. 길가에 프랜차이즈 피자집이 보였다. 오늘 저녁엔 피자를 먹을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차는 도로 가장자리에 강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웅덩이 위를 지나갔다. 차바퀴에 꼬리를 밟힌 웅덩이의 물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웅덩이에서 거대한 해일이 일어났다. 물은 비명을 지르며 마침 피자집 앞을 지나던 여자를 덮쳤다.
여자는 무릎까지 오는 하늘색 H라인 스커트에, 딱 달라붙는 하얀 블라우스 위로 얇은 니트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물에 대해 방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옷들이 아니었다. 우산을 내려쓰고 작은 서류 가방 하나를 가슴께까지 올려붙이고 종종 걸음으로 걷던 여자는 그야말로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내 차바퀴에서 시작된 웅덩이의 해일은 여자가 서류 가방을 붙잡고 있던 손부터 그 아래까지를 빈틈없이 훑으며 떨어져 내렸다. 잠시 세상은 슬로모션처럼 움직였다. 여자도 한동안 멈춰서 있었다. 놀라서 벌린 입도 그대로였다.
난 10미터 정도 더 나아간 다음 브레이크를 밟았다. 작은 골목으로 난 우회전 길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난 미안함과 걱정이 범벅된 감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크고 선한 눈에 눈물이 반쯤 고여 있었다. 그 눈을 보자 더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정지 상태에서 풀려난 듯,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매 끝을 움직여서 물방울을 떨쳐내고, 가방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을 털어냈다. “아이 참, 어떡하지.”
전혀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괜찮다는 답을 바라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 젖은 빨래처럼 온 몸에서 물방울이 떨어뜨리고 있던 그녀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제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를 말씀해주시면 태워다 드릴게요. 세탁비도 책임지겠습니다.”
“저, 지금 제가 좀 급해서요. 중요한 브리핑을 하러 가는 출장길인데, 좀 태워줄 수 있으세요? 옷이 젖어서 옷부터 갈아입어야 할 거 같은데, 저희 집으로만 좀 태워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물론이죠. 제가 마침 오전엔 여유가 좀 있어요. 옷을 갈아입으시고 회사까지도 태워드릴게요. 너무 죄송해서 그렇게라도 해드려야 할 거 같아요.”
“아니에요. 집 앞에서 택시를 타면 돼요.” 그녀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달고서 이야기했다.
“택시 타러 가는 길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또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요.” 난 그녀의 젖은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에 젖어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웃음이 날 뻔 했다. 난 순간 스스로를 꾸짖었다. 이런 상황에! 정신 빠진 녀석!
“음. 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차 뒷자리에 앉은 그녀는 내가 건넨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대신, 직물로 된 차 시트가 젖을까봐 시트 위에 수건을 올리고 그 위에 앉았다.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조심스러움과 배려가 느껴졌다.
“시트 젖어도 돼요. 몸 좀 닦으세요. 추우실 거 같은데.”
“아니… 괜찮아요. 수건에서 냄새가 좀 나서요.”
“아니, 그거 새 수건… 제가 운동하려고…” 당황해서 말을 못 잇고 있는 내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농담하는 게 버릇이 돼서요. 초면인데. 친구한테 하던 버릇이.”
아까 눈물이 그렁거리던 눈은, 다른 모드의 기능 버튼을 누른 듯 전혀 다른 느낌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떤 웅덩이도 없는 초록 풀밭, 나뭇잎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는 햇살, 그런 것들이 연상되었다. 나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공통점을 거의 찾을 수 없지만, 발을 내딛고 달려보고 싶은 그런 세계가 그려졌던 것이다. 그때 난 내가 할 일을 떠올렸다. 난 오전 두 시간만 아픈 게 아니라, 오늘 하루 통째로 아픈 걸로 회사에 연락을 해야 한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러 집이 들어간 사이, 난 회사에 연락을 넣었다. 아까 문자로 알린 내용에서 ‘고열’과 ‘링거’를 추가했다. 사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내 몸의 혈류가 빨라지고 있었다. 몸에 열도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담하고 요가를 했을 법한 가녀린 몸이었지만, 크고 선한 눈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폭발적이었다. 물이 뚝뚝 흐르던 머리칼을 떠올리자니 다시 웃음이 났다.
잠시 스스로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던 여자를 만났던 어젯밤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옷을 흠뻑 젖게 만든 일이 두고두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일지도. 그녀의 그렁거리던 선한 눈 때문일지도, 어쩌면 날 당혹스럽게 했던 그녀의 농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맘엔 오늘 그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들어섰다. 꽃이 언제 피었는지, 나무가 언제 가지를 뻗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나왔다. 아까와 색깔만 다른 H형 스커트와 하얀 바탕에 꽃무늬 나염이 된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겉옷만 긴 재킷으로 바뀌었다.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의 차림새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리고 어설픈 느낌이 있었다.
“사실 입사 후 첫 브리핑이거든요. 선배들이 브리핑 할 때는 아나운서처럼 입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해서 두 벌 사놓았는데 다행이에요. 한 벌 뿐이었다면 눈앞이 아득했을지 몰라요.” 내가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옷차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 옷차림이 생소하고 어색한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 입는 스타일이 아닐 것이다. 내게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어색해하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나운서 같으세요. 비가 오니까 기상 캐스터 같은 느낌도 드네요.”
“어떤 기상 캐스터는 비오는 날에 우비를 쓰고 방송을 하지 않나요?”
“네 저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무더운 날엔 수영복을 입고 나오기도 했던 거 같아요.”
“수영복이요? 혹시 성인 방송 보셨어요?”
“아, 제가 착각했나봅니다.” 난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녀는 다시 소리 내어 웃더니, 농담이라고 말했다.
“오늘 분위기 보고 우비라도 써야 할까 봐요.”
도착한 곳은, 한 중견 기업 본사였다. 그녀는 광고 기획사의 신입 사원이었다. 몇 달 동안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웠던 광고 브리핑을 처음 하는 날이었다. 그녀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검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우산을 펴들고 차에서 내렸다. 어쩌면 내 오늘의 여정은 여기까지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차문을 닫고 차창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난 차창을 열었다.
“오늘 감사해요. 덕분에 목적지에 잘 도착했어요.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저 때문에 늦으실 뻔 했는데요 뭘. 음, 혹시 브리핑이 잘 되면 제게 축하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잘 안되면 어떡하죠?”
“위로할 기회를 주셔야죠.”
“이왕이면 축하를 받고 싶네요.” 그녀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그녀의 명함을 한 장 꺼내 내게 던지다시피 건네고는 회사의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To be continue. 2편에 계속.
P.S.
오늘 아침 비오는 출근길에 떠오른 상상을 가지고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3회 정도로 이어갈 듯 합니다. 오후에 비가 그치긴 했는데, 비 계속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