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곰은 좋아하지만 옐로스톤 공원에서 회색곰을 만나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야생 곰은 위니 더 푸우나 위 아 베어 베어스같은 말랑말랑한 존재가 아니니까요. 일단 저는 키 2.7m, 몸무게 450kg, 일어서면 아파트 2층까지 발톱이 닿는 곰을 눈 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갑자기 왜 뜬금없이 곰 이야기를 하냐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곰을 보고 싶어하진 않지만, 목욕탕에 몸을 담구면 항상 회색곰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르캉은 감기와 업무의 파상공격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고, 아침에 제대로 씻지도 못해 후줄근한 몰골로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아무리 판교가 프리하다고는 하지만 오른쪽 옆머리가 삐져 나온 건 판교가 아니라 재택근무 기준으로도 아웃이었습니다. 회사 사람들에게 최대한 왼쪽 모습만 보여주고 이야기려고 노력했고, 점심시간에는 맨 오른쪽 자리에 앉아 3단 도시락을 10분만에 처치하고 뛰어나왔습니다.
다행히도 저에게는 지친 몸을 쉬게 할 곳이 있습니다. 판교의 스포짐 헬스장은 20kg 케틀벨이 없는 걸 제외하고는 꽤 괜찮은 시설이고- 그 중에서도 제일 좋은 점은 목욕탕이 진짜 대중목용탕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판교의 오아시스라고 칭해도 괜찮겠죠. 저는 씻고 온탕에 몸을 누이며 회색곰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회색곰 왑은 어니스트 시튼이 쓴 동물기 중에 나오는 곰으로, [전서구 아르노], [고양이 키티], [늑대왕 로보]같은 걸출한 동물 이야기 중에서도 오랫동안 생각나는 명작입니다.
그런데 왜 목욕탕에 들어가면 왑 이야기가 생각날까 - 뿌리를 더듬어 보니 왑이 옐로스톤 산맥(글을 써놓고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올드스톤 산맥이라고 썼었군요. 진짜 뼛속까지 스티미언입니다)의 천연 온천에 몸을 담구고 총상과 어깨 결림을 치료하는 장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산맥이 내려다보이는 천연 유황 온천에 몸을 뉘이는 장면은 어린 마음에도 느껴지는 로망이 있습니다. 노출증에 대한 로망인지 온천에 대한 로망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올드스톤 공원-아니 옐로스톤 공원이라니까- 에 갈 일이 있다면 꼭 화산에 데워진 온천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달걀과 맥주가 있다면 훨씬 행복하겠지요.
그렇지만 온천의 이야기를 빼고도 오래 생각이 나는 건, 회색곰 왑 이야기가 서사적으로도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왑은 어렸을 때 부모와 동생, 형을 모두 총탄에 잃었고, 흑곰과 엘크에게 쫓겨 도망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운명이 왑에게 쓰디 쓴 시련을 준 만큼 두 배의 몸집도 주었죠.
왑은 무럭무럭 자라 옐로스톤 산맥의 거대한 폭군이 되었고, 자길 괴롭혔던 흑곰과 사냥꾼도 죽여버렸습니다. 아, 이 얼마나 달콤한 복수인지. 하지만 달콤함은 길지 않았습니다. 복수도 끝났고, 옐로스톤 산맥 하나를 넘나드는 거대한 영토도 있었지만, 왑은 외로웠고 갈수록 흉폭해지기만 했습니다. 총탄을 맞은 어깨는 욱신욱신 쑤셨고, 너구리 덫에 잃은 발가락은 돌을 들어올리기 어렵게 했으며, 곰 덫에 걸린 손목은 뼈가 반쯤 으스러져 있었습니다.
이런 몸뚱이를 이끌고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던 왑은 두려운 징조들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손보다 훨씬 높은 곳에 그어져 있는 발톱 자국, 진흙 목욕 자국, 나무에 몸을 비벼놓은 털들, 자신의 영토에 침입한 흔적들. 왑은 싸우려고 마음먹지만, 무서운 징조들은 갈수록 왑을 지치고 피곤하게 합니다. 유황 온천에서 몸을 뉘이고 체력을 회복하려고 했지만, 유황 온천의 나무에는 방금 새겨진 날카로운 손톱 자국이 보입니다. 결국 왑은 자신의 영토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 갑니다.
야생 동물들의 수호천사가 작은 골짜기에 서서 손짓한 것이다. 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왑은 수호천사의 눈에 어린 눈물도 입술에 또렷하게 새겨진 연민의 미소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야생동물의 수호천사는 지치고 노쇠한 왑을 유황 가스가 쏟아지는 계곡으로 인도합니다. 유황 가스를 마시면 몇 분 안에 죽음에 빠지죠. 계곡에 누워 깰 수 없는 잠에 드는 왑을 보며 저는 어린 마음에도 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이렇게나 슬픈 이야기를?? 원래 모든 동화 - 아니 동물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시튼 동물기의 75%는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굶어 죽거나 독을 먹고 죽거나 하는 비극적인 이야기었고, 이곳에 쓰다 보니 PTSD처럼 제 머릿속을 강타하는군요. 특히 여우 빅스의 눈물은 - 으악!!! 간호사!!!
하여튼 - 회색곰 왑이 생각나는건 서사적 구조 + 유황 온천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쓰다 보니 자꾸 기억이 나는군요. 이런 구절도 있었습니다 - 운명은 왑에게 슬픔이 든 잔과 기쁨이 든 잔을 주었고, 왑은 슬픔이 든 잔을 선택해 마시고는 내리쳐 깨 버렸다. 왑의 몸집은 두 배가 되었고, 대신 외로웠다 -
나는 그래서 목욕탕에 들어가면 유황 온천과, 회색곰과, 슬픔과 외로움에 대해 생각이 납니다. 욕탕에서 겨우 이십분동안 헤험치는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놀랄 지경이군요.
나는 상처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상처를 통해 성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상처가 없이도 잘 자랐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당신을 상처없이 지켜주고 싶다. 심지어 그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_이상과 금홍
곰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오랜만에 심리학 글을 써 볼까 해요. 심리학의 안정성 - Stable한 마음? 에 대해서, 내일은 책도 좀 읽고... 이러다가 오리너구리 꽥꽥으로 등장할지도 모르지만, 모두들, 곰방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