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혈변을 보았다. 치질인가 싶어 항문외과를 찾았더니 치질이 아니었다. 의사는 내게 심각한 얼굴로 얼른 대학병원으로 가서 대장 검사를 받아보라고 한다.
대학병원 검사 후 들은 병명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궤양성 대장염> 이었다. 의사는 앞으로 몇년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검진을 받아야 한다며, 희귀난치병 환자에게 적용되는 산정특례자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렸다.
난 어렸을때부터 정말 건강했다. 감기 외에는 딱히 아파본적도 없다. 그런 내가 희귀난치병이라고???
돌이켜보니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반복하며 내 몸이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나보다.
첫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면역체계에 이상이 와서 매년 봄 알러지에 시달리고 있다. 눈, 코, 목이 간지러워 외출은 꿈도 못꾸고 창문을 꼭꼭 닫고 집에만 있어야 한다. 내게 봄은 더이상 예쁜 꽃구경 다니는 그런 계절이 아니다.
과일 알러지도 생겨서 너무나 맛있게 먹던 복숭아, 사과, 체리, 자두도 조금만 먹으면 목구멍이 간지럽고 입술이 부풀어 올라 먹지 못한다. 첫째 아이가 일곱살이니 이런 과일들을 못 먹은지 6년이 되었다.
그리고 둘째 아이 출산 후 1년만에 난 궤양성대장염에 걸리게 된것이다.
내 몸은 지독하게도 모성애가 뛰어난가 보다. 내 안의 좋은 영양분을 아이들에게 모두 내주고 껍데기만 남은것 같다. 아니, 나뿐 아니라 모든 엄마들이 태아에게 좋은 영양분을 내어줄것이다. 그렇게 엄마에게는 아이를 갖는 순간부터 "희생"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가 보다.
고치기 힘들다는 병명을 얻고 나니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명품 가방이나 좋은 차 따위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내가 일찍 죽을 것을 대비해 아이들이 혼자 힘으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야했다. 더하기 빼기보다 더 중요한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싶었고, 조금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생겨도 도망치지 않고 부딪혀보게 하고 싶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많은 아이들이었으면 싶었고 사랑을 듬뿍받아 사랑이 넘치는 그런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다.
시간이 없다. 당장 죽을병은 아니지만 내 몸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아이들과 추억을 많이 쌓아둬야 했다. 그래서 올해는 유독 여행도 많이 다녔던 것 같다. 앞으로도 틈만 나면 산으로 바다로 함께 놀러다닐 것이다.
시간이 없다. 손 잡고 함께 보고 싶은 풍경도, 조근조근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함께 읽고 싶은 책도 너무너무 많다. 그저 거실에 앉아 막내딸의 엉뚱한 재롱에 깔깔깔 뒹굴며 웃는것도 좋다. 일곱살 아들의 태권도 시범을 보며 감탄하고 박수쳐주는 것도 좋다.
아니, 시간은 충분하다. 시간을 이리저리 주물러서 잘 쓰면 된다. 화내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을, 꾸중하는 시간보다 격려하는 시간을, 텔레비전 보며 멍하니 있는 시간보다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피곤하다며 등돌리고 자는 시간보다 품 속에 꼬옥 안고 잠자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딸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한번이라도 더 쓸어 넘겨주고, 점점 도톰해져만 가는 아들의 손을 한번이라도 더 잡아주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웃을 때면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딸의 볼에 입맞추고 탄탄해져 가는 아들의 어깨를 꽉 껴안는 시간을 늘리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 곁에 "엄마"라는 이름으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어주고 싶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이 엄마 아니던가.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그리고 바로 지금 이시간이 소.중.하.다. 너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