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의 연결 통로를 지나 공항으로 들어서자, 네 살 첫째 딸이 화가 잔뜩 나서 외쳤다.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왜 다시 온 거냐고!"
수화물을 찾기 위해 가는 내내 한 스무 번은 반복한다. 비행기 안에서 여행의 즐거움과 기대감에 취해서 웃고 떠들던 딸이었다. 딸의 눈엔 우리가 출발했던 공항이나 도착한 제주 공항이나 똑같아 보였던 거다.
"우리 비행기 타고 다른 데 온 거야!"
라고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고서야 눈 앞에 펼쳐진 다른 풍경에 딸은 아빠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지나고 보니, 딸의 말은 우리 여행의 본질을 압축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떠나온 여행인데, 아이들과 함께 일상은 우리 여행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라왔기 때문이다.
가족여행, 더 정확하게는 육아의 한가운데 머물러 있는 우리네 엄마, 아빠들은, 어디론가 떠났지만,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울음과 돌봄이 필요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다시 수시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2
정확한 구절은 생각나지 않지만, 여행은 낯선 곳에서 새로운 나로 잠시나마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설레는 거라는 요지의 글을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읽은 게 기억난다.
결혼 전에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홀로 여행을 떠났을 때, 알랭 드 보통의 말은 백 퍼센트 유효했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낼 때 내가 원래 있던 곳과는 다른,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난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평소 꺼리는 마초적인 인간으로 변할 수도 있었고, 재미없는 수다쟁이가 될 수도 있었다. 세련된 모습으로 일과를 보내는 도시 남자로도, 나무 가꾸기를 좋아하는 수더분한 남자로도 보일 수 있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봐주든 그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나를 연출하고 나 스스로 그렇게 느끼면 되는 일이다.)
여행지에서 내가 될 수 있는 인간형은 무궁무진했고, 난 수없이 열린 가능성에 가슴 설레며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새로운 나로 돌아다니는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면 여행지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경우, 알랭 드 보통의 말은 대입할 수 없는 수식이 된다. 애초에 나사 크기와 맞지 않는 드라이버를 갖다 댄 거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일상의 남편과 아빠로 여행을 가는 것이 전혀 설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가슴을 조이던 나사못은 쓸모 없어졌지만, 새로운 '나'가 아닌, 일상의 나 그대로 떠나기 시작하면서 들고 있는 드라이버에 들어맞는 다른 나사못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카시트에 매달려 잠을 자는 동안, 아내와 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깔깔거린다. 먹고 즐기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드러내기에 적절한 맛집을 찾아가는 대신, 나와 가족의 미뢰를 실제적으로 폭발시킬 곳을 찾는다. 크고 놀라운 동물을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대신, 아이가 먹이를 직접 줄 수 있는 작은 동물들을 만나러 간다.
아이가 없을 때의 여행은 주로 여행 이후의 만족을 위한 행위로 가득했다. 나중에 SNS에 올릴 행복한 내 모습, 풍경, 음식 사진을 찍거나, 훗날 이 여행을 기억할 수 있는 기록물을 남기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사전에 그 기록들을 위해 여행의 코스를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가는 여행은, 지금, 여기, 그 순간을 위한 행위로 가득 채워진다. 당장 아이가 웃고, 즐기며, 뭐 하나라도 신기해하기를 바라는 동기로 가득하다. 훗날을 위한 기록만큼, 이 여행이 지금 각자의 마음에 의미 있게 새겨지는 것도 중요해지는 것이다.
홀로 여행을 갔던 이전엔 바깥 세계와의 관계 확장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면, 이젠 우리가 낯선 곳에서 시간을 함께 하며 우리 안의 친밀감과 연대 의식이 더 깊어지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렇게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 일상을 매달고 가는 아이들과의 여행은 다른 차원에서 반짝이는 나사못이 가슴을 조여주는 것이다.
3
우리의 첫 번째 제주도 가족 여행은, 첫째 딸이 아내의 뱃속에 있었던 5년 전 태교 여행이었다. 두 번째 제주도 여행은, 첫째 딸이 두 살 때 갔던 2년 전 여행이었고, 이번 여행은 둘째 딸까지 합세한 세 번째 제주도 여행이었다.
둘에서 셋으로, 셋에서 또 넷이 된 여행.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우리의 여행은 고단해졌지만, 그만큼 우리들의 이야기는 풍성해졌다.
다음 여행에서 우린 이전의 여행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 추억들은 몇 만년을 쌓여온 퇴적층처럼 켜켜이 쌓여 우리 가족을 단단한 바위산처럼 만들 것이다. 웬만한 외부의 충격엔 끄떡하지 않는.
비록 일상을 매달고 가는 여행이지만, 다음 여행, 그다음 여행을 기대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