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가정과 ‘이야기’
제이슨은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는 열세 살 딸과의 갈등으로 골치가 아프다. 얼마 전 딸의 옷장에서 마약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딸은 질이 나쁜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고 그 녀석은 담배 냄새를 풍긴다.
그는 딸의 남자 친구에게 밤 10시까지는 딸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얘기했지만, 딸의 남자 친구는 매번 “왜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제이슨과 딸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제이슨은 친구를 만나 그 고민을 털어놓았다. 글을 쓰는 친구는 엉뚱하게도 제이슨에게 ‘이야기’에 관한 얘기를 했다.
“자네 딸은 썩 좋은 이야기를 살고 있지 않은 거야. 나쁜 이야기에 갇혀 있어.”
제이슨은 이상하게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에 관한 말에 관심이 갔다.
“이야기에는 뭔가를 원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얻어내는 인물이 있지.”
친구와 헤어지고도 제이슨의 마음에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제이슨은 그것이 자신과 딸의 문제를 해결할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이슨은 일단 딸에게 고함치는 걸 멈추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전 세계에 고아원을 지어주는 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자신의 가족이 함께 해볼 만한 ‘좋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관에 전화를 걸어 비용을 물어보니 2만 5천 달러가 든다고 했다. 얼마 전 주택 융자를 받은 그에겐 버거운 비용이었다. 하지만, 그 날 밤에 그는 아내와 딸을 불러다 놓고 발표했다.
“멕시코 어느 마을에 고아원이 필요해. 아이들과 사람들은 그것이 없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어. 그게 생긴다면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어. 그 고아원을 내가 지어주기로 했어.”
가족이 함께 어떤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하는 것은, 때때로 쉽지 않은 선택일수도 있다.
그는 고아원을 지어주기로 했다는 것과 비용을 말했다. 아내와 딸은 그를 실성한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아내와 딸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밤에, 잠자리에서 그는 아내에게 자기가 아까 한 말의 의도를 이야기했다.
“가정에 모험이 없고 남을 돕지 않으니 딸이 흥미를 잃고 있는 거야.”
다음 날 그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그에게 다가와 뒤에서 그를 껴안으며 그가 자랑스럽다고 얘기했다. 제이슨은 아내에게 미리 얘기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내는 우리가 함께 고아원을 지을 거라고 대답했다.
며칠 후에, 그의 딸 레이첼은 안방에 들어와서 제이슨과 아내에게, 멕시코에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다. 자기 SNS에 고아원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도와줄 거라면서, 멕시코에 가서 그 아이들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그의 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제이슨은 다시 만난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영웅 역할을 연기하는 여자치고 자기를 이용하는 남자와 데이트하는 사람은 없지. 딸은 이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 잠시 잊었던 것뿐이지.”
이 이야기는 도널드 밀러의 에세이 <천년 동안 백만 마일>에 나오는 얘기를 요약한 것이다. 제이슨은 저자의 친구이고 실제 겪은 이야기다. 이 책은 이야기의 원리가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리고 우리 삶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실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가
앞에 언급한 제이슨의 이야기를 읽고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선택의 연속이고,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내 삶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내가 좋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는지 나쁜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지 말이다. 아주 지루한 영화처럼 아무런 개성도, 흥미도, 색채도 없는 이야기를 살고 있는지, 모험으로 가득 찬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살고 있는지 말이다.
우리 삶으로 쓰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보다 중요하다.
어떤 이야기를 써갈지는 각자의 몫이다. 앞의 얘기에서 제이슨은 자신의 가정에 좋은 ‘이야기’가 없어서 딸이 역할을 맡을만한 선택지가 없었음을 깨닫는다. 주도적인 역할을 갖지 못한 아이는, 자신을 주역으로 만들어 줄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그것이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상관없다. 결국 레이첼은 나쁜 이야기 속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레이첼에게 그 선택은 부모의 기대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자신을 극복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역할의 선택지가 없을 때 어떤 아이들은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지만, 어떤 아이들은 레이첼처럼 주도적인 역할을 찾고 싶어 한다. 레이첼은 아버지가 설계한 ‘좋은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을 발견하고,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며 살고, 누군가는 그저 앞에 주어진 일상만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나의 가정에서, 또 직장에서 내가 살아갈 이야기를 설계하는 일은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들 수 있는 좋은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일까. 제이슨 가정의 이야기를 참고하면, 다음 두 가지 요소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첫째는, 다른 이를 돕는 이야기. 둘째는, 구성원 모두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가진 가정이라면, 아이들이 엇나가기 힘들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가진 직장이라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직원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 교실이라면, 학교에 오고 싶은 학생들이 많아질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와 내 주변이 좋은 이야기 그 자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뭔가를 원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얻어내는 이야기 속 인물’에 감동하는 이유일 것이다.
내 가정을 위해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떤 이야기를 설계할지를 고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