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후에
자그마치 78개 삶의 기록과 대면해야 했다.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언맨 수트에 맞먹는 정신의 수트를 걸치고 78개의 글이 난무하는 치열한 삶의 기록 속으로 들어갔다. 일기라고 가볍게 봤는데 제대로 무장한 글들이 달려들었다. 유려한 문장에 난사 당하고, 아찔한 체험에 뒤통수를 맞고, 감동 유발하는 스토리에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78개의 모든 글 밖으로 나왔을 땐 수트가 다 망가졌다.
심사하는 이틀 동안은, 닥터 스트레인지급 마인드 히터에게 사로잡힌 듯, 내 일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78개의 글이 내 안에 뿌린 씨앗들이 끊임없이 피고 졌다. 어쨌든 78개의 무시무시한 글들에 78개의 숫자를 달았으니 내 임무는 끝이 났다. 이제 수트를 벗고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전투의 격렬함은 마약과도 같아서, 종종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다.”
전쟁의 상흔으로 괴로워하던 퇴역 군인이 다시금 전쟁터를 그리워하는 영화 속 이야기는, 이틀간의 심사 기간을 거친 후의 내 상태를 말해주는 가장 비슷한 은유였다. 난 78개의 글에 숫자를 달아야 하는 괴로움을 당한 끝에, 그 일기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78호가 있는 마을에 들어가 임무 수행을 끝내고 난 후에, 스스로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이번엔 숫자가 아닌, 한 마디의 말을 건네기 위해서.
그들의 기대와 바람이 이루어졌든, 사위어졌든, 삶으로 낳은 이야기에 감상 한 줄씩은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심사를 위해 읽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업무량이 많은 주간, 틈틈이 일기의 반 정도를 다시 읽었다.
78개의 기록에 건네는 한 마디(1~40번 일기)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 /
“아버지의 장례와 딸의 탄생이 중첩된 날의 복잡한 심경을 감각적인 구성으로.”셋째 아이와의 만남 /
“희소성은 가치의 척도. 예외가 있다. 세계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이지만 더없이 가치 있는 일, 출산. 그 아름다운 기록”2018년 4월 27일 /
“조카 ‘기쁨’이도 피해갈 수 없는, ‘울음’의 세계. 울음으로 꿴 존재에 대한 단상.”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수 있길 /
“오늘 하루 어땠어? 관계 회복을 부르는 평범한 말. 담담히 적어내린 문장이 주는 울림. 평범한 말들이 주는 치유.”버번 위스키, 돼지 불판 볶음밥, 그리고 한국 /
“한국인 뉴요커의 꿈은, 위스키와 돼지불판 볶음밥을 먹고 자란다.”봄날의 일기, 좋아해요 /
“턱 막히는 느낌이라고 앓는 소리 후에, 할 말 다 하는 번호 일기. 소파에서 쓴 듯 편안해서 누워 읽고 싶은.”햇살 좋은날 /
“이 글을 요약하면, 딸아 아빠는 아빠의 아빠가 그리워. 속정 깊은 남자가 글에서 보인다.”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기저귀화 '성큼' /
“아들의 배변 훈련의 성공을 핵 폐기 기사로 패러디한 수준급의 유머를 보라. 이 글만큼은 폐기되지 않은 핵폭탄이다.”아버지와 돈가스 그리고 명동 /
“사후를 더듬어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먹먹함. 아버지가 남길 조각들을 더듬더듬 찾아보고 싶은.”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
“옷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묻어 있다. 빨래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아무한테나 보이는 건 아니다.”나는 살아왔다. 그 속에 진짜 '나' 는 존재했을까 /
“다시 주먹 쥐고 일어나. 나로 살아가기로 한다. 몇 번째 다짐일까.”벚꽃이 떨어지는 날, 추억도 함께 떨어지다 /
“누구나 한 번씩은 기억의 방 하나에 살고 있는 그녀를 불러낸다.”아빠의 스물두 번의 환생 /
“여름날의 따뜻한 우화를 만들어낸 가족. 점의 개수가 환생의 수라고? 점 빼러 피부과에는 못 갈 가족.”어느새 난 일기를 쓰고 있었다 /
“일기가 안 써진다는 외침이 일기가 된 글. 공복을 채우려면 ‘굶주림’을 먹읍시다.”시에 대한 나의 태도 /
“‘그 분’이 손끝에 기름칠을 해주시면, 시가 술술. 그 분이 오시면 시가 뭐 별 건가.”강낭콩을 심었다 /
“강낭콩과 아이는 기다려야 자란단다. 쉿, 기다려도 싹이 안 트는 강낭콩이 있다는 건 비밀.”What is Love? 나에게 사랑이란? /
“트와이스의 노래를 통해 생각해본 나의 사랑관. 시련의 물감으로 채색한 사랑의 색.”끄적끄적 밀린 일기 /
“실패도, 부족함도, 그녀의 손을 거치면 유쾌한 기록이 된다. 앞태는 몰라도, 뒤태만큼은 빵빵한 엉덩이 같은 글.”봄사월 이십팔일 /
“길을 걷는 건지, 너를 보는 건지. 함께 걸어 좋은 건지, 함께 걷는 게 불만인 건지. 도통 모를 나의 맘.”무명의 속옷 가게 앞에서 /
“속 옷 가게의 현수막에서 시작하여, 박인환의 시와 잡지의 표지 그리고 ‘나’를 솜씨 좋게 줄 세운다. 알고 보니 모두 한‘통속’!”스팀잇 과거 일기 – 나의 글 /
“일기 형식 변화의 과정을 기록하다.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 일기도 예외가 아니다.”왕초일기 – 불행 뒤에 찾아오는 행복 /
“방콕의 공항에서 검색대를 통과하여 환전하고 카페에 들른 이야기. 혼자 간 여행은 단조로워도 즐겁다.”메이커 스페이스 꼭 하고싶어요 /
“그물을 넣기만 하면 물고기를 건질 것 같은데… 그물을 빌릴 수가 없네.”숯불 양념돼지갈비와 행복 /
“육아가 시작되며 사라진 행복, 숯불 양념돼지 갈비가 찾아드립니다. 아이는 잠시 넣어둬~ 넣어둬~”아내가 출산하던 날 /
“잃어버리기 싫은 것일수록 잃어버리는 나쁜 상상은 더 생생하다. 상상의 끝엔 기쁨이.”2인분이 되고 싶다 /
“2인분의 몫을 하게 만든 건, 격려. 격려가 필요 없는 일은 2인분의 양을 먹는 것.”
P.S.
나머지 일기들(41~78번 일기)은 틈나는 대로 다시 읽고 한 마디씩을 달려고 합니다. 심사를 하며 팔로우가 안 되어 있던 이웃은 전부 팔로우를 했습니다. 혹시 안 된 분은 까먹고 넘어간 경우입니다. 새로운 글 이웃들이 생겨서 기쁩니다. 일기 다시 읽고 문장을 쓰느라, 이웃들의 피드를 살피지 못했어요. 이번 주까지만 일기에 파묻혀 지내려 합니다. ;;;
삼주동안 준비해서 오늘 끝낸 운동회. 운동회 담당자인 나에게 남은 건, 온 몸에 묻은 운동장 먼지들. 그마저도 물로 씻어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 이리 좋네요.
우리 아이들 아직 어린이가 아니지만, 내일 어린이날 기분을 만끽하러 떠납니다. 내일, 어린이를 기쁘게 하든, 어린이가 되어 놀든, 둘 중에 하나는 이루시길 바랍니다.